얼마전 다음 포털에서 드라마 '미생'의 마부장(손종학)과 성대리(태인호) 중 누가 더 싫으냐는 내용의 온라인 투표를 했다. 예상했던대로 부하직원을 때리며 미친 사람처럼 팔팔 뛰는 마부장 보다 후배의 공을 가로채고 술값을 덤터기 씌우는 성대리 쪽이 더 싫다는 의견이 많았다(투표 결과 보기). 마부장이야 어차피 부장급이라 마주칠 일이 별로 없고 성질내고 폭발하는 만큼 그냥 좀 무서울 뿐이지만 성대리의 앞뒤다른 간사함은 대처하기 쉽지 않다. 직장인들이라면 한번쯤 성대리같은 인간형을 겪어본 경험이 있으리라. 뭔가 주변에서 나만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날 조롱하는 듯한 분위기가 있을 때는 성대리같은 직장동료의 작당인 경우가 많다. 좋은 사람인척 하고 있으니 마부장처럼 대놓고 욕할 수도 없고 일만 잘하면 모든게 용서되는 회사에서 매일 그런 사람을 마주친다는 자체가 스트레스다.
그러나 한가지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은 나 역시 누군가에게 마부장이자 성대리일 수 있다는 점이다. '미생'은 드라마이니까 그나마 선악구도가 상대적으로 뚜렷하고 잘못에 대한 상황판단이 가능하지만 대개의 인간은 나쁜 점과 좋은 점을 동시에 가진 경우가 많다. 사람은 실적에 목매고 살아남기 위해 기를 쓰다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나쁜 짓을 한다는 자각없이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 마련이다. 기한 내에 마치지 못했다며 부하직원에게 소리지르고 사이가 껄끄러운 사람을 고립시키기 위해 험담하는 수작 - 살다보면 한두번쯤은 목격하는 일이다.
'미생'의 마부장과 성대리는 직장내 악당의 대명사로 지목받지만 자신이 소시오패스 기질이 있으면서 한석율(변요한)에게 소시오패스라 몰아부치는 성대리처럼 대부분은 그들과 똑같은 행동을 한다는 걸 잘 모른다. 마부장이나 성대리가 직장내에서 자리를 지키고 승진할 수 있는 것은 우리들 마음 한구석에 그런 행동을 용납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사람들은 나쁜 짓을 해도 괜찮다는 판단이 설 때 악행을 저지른다. 원인터의 직원들은 계약직 장그래(임시완)을 무시해도 되고 여사원인 안영이(강소라)를 괴롭혀도 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마부장 성격이 거지발싸개같아도 그 밑에서 일하면 승진이 보장된다는 하대리(전석호). 여자를 싫어하는 마부장이 무서워 안영이 괴롭히기에 동참한 자원2팀. 그들은 안영이가 일을 잘하면 잘할수록 마부장에게 더 찍힌다며 안영이를 싫어했다. 마부장은 장백기(강하늘)처럼 안영이 앞을 막아서는 직원이나 정과장(정희태)처럼 안영이의 폭행을 막는 사람이 한사람이라도 더 있었다면 그렇게까지 마음대로 행동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눈치란게 있다면 평판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었을테니까. 따지고보면 마부장이나 성대리는 실적에 집착하는 조직이 만들어낸 괴물이다.
씁쓸하지만 사람들의 말처럼 드라마 속 오상식(이성민)의 '우리'는 판타지다. 오차장은 계약직 한사람을 위해 여러 부서를 찾아가 항의하고 천과장(박해준)은 최전무(이경영)에게 장그래를 부탁한다. 결국 김대리(김대명)가 영업3팀이라서 주재원 지원에서 물먹은 걸 아는 오차장은 최전무가 추진하는 중국 태양열 사업을 떠맡기로 한다. 최전무의 꽌시가 뒷돈이 오가는 수상쩍은 관계라는 의심을 하면서도 돌다리를 두들겨 건너듯 조심스럽게 진행한다. 오차장은 김대리의 승진과 장그래가 정규직이 될 수도 있는 가능성에 승부를 걸기로 한 것이다.
최전무가 회사의 이익과 실적에 계약직의 희생과 부하직원의 비리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형이라면 오상식은 '우리'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타입이다. 최전무는 한때 오상식과 함께 일했지만 계약직 은지(서윤아)를 넘어서지 못하는 오상식을 못마땅해했다. 그런 최전무가 오상식에게 손을 내민 계기는 박과장(김희원)의 퇴출이다. 최전무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고 달려온 자신의 방식이 어떻게 잘못된 건지 곱씹어본다. 실적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비리쯤은 눈감아주던 최전무가 요르단 사업을 따내는 영업3팀의 저력을 보며 오상식과 일을 함께 한 것은 변화를 꾀하기 위한 시도였다.
그러나 최전무의 방식과 오차장의 방식은 어떻게든 충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중국 업체 측의 수익율이 지나치다고 의심하던 장그래는 장백기(강하늘)의 귀띔으로 오차장이 자신을 위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중국 주재원 석대리(장준휘)와의 통화를 녹음한다. 이렇게 오차장의 선의와 장그래의 선의가 어긋나는 버리는 바람에 중국 태양열 사업은 어쩌면 꽤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최전무라는 현실과 오차장이라는 판타지의 만남은 그렇게 빗나갔지만 영업3팀끼리 서로를 챙겨주는 그 마음 만은 통속적인 감동이 있다. 사람을 위해 승부를 건다는 건 현실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니까.
여담이지만 '미생'이 드라마니까 마부장이나 성대리같은 캐릭터가 딱 잘라 '악당'이 되는 것이지만 진짜 사회 생활을 하다 마주친 성대리나 마부장은 어딘가 안쓰럽기도 하다. 화를 참지 못해 소리를 꽥꽥 지르던 마부장같은 상사는 직장생활은 승승장구했지만 갑작스런 병으로 죽을 때 회사동료들이 거의 찾지 않는 외톨이가 됐고 입사동기와 부하직원 사이에서 자기 잇속만 챙기던 성대리같은 동료는 아슬아슬 줄타기하는 직장생활을 하다 위장약을 달고 살았다. 권선징악 차원이 아니라도 평범한 인간은 남에게 못할 짓하면 그 대가를 치르기 마련이다.
물론 '땅콩리턴'의 주인공처럼 처음부터 재벌 3세로 태어나 회사에서 두목놀이를 하는 경영자들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진짜 사이코패스도 있지만 그런 타입은 대개 타고난 재벌이 아닌 이상 승진하기 힘들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느끼게 된다. 성대리와 마부장같은 괴물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김대리와 천과장, 장그래라는 '우리'가 없다면 오차장이란 판타지는 애초에 불가능하는 진실도. 드라마 속 오차장이 계약직 한 사람까지 '우리'로 품어주기에 김대리와 천과장이 오차장을 '리더'로 인정해주기에 진짜 '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미생'에서 보고 있는 오상식의 판타지는 통괘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불편하다. '오차장'이라는 판타지가 무책임한 위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오차장의 도전이 성공하길 바라다가도 우리가 평소 마주치는 현실은 성대리와 마부장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오상식같은 리더는 언젠가는 조직에서 도태된다는 현실이 더욱 판타지를 껄끄럽게 한다.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에서 '리더'의 자질을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잊혀졌던가. 반면 그렇기에 더욱 오상식의 판타지를 응원하게 되는 듯하다. 장그래도 원인터에서 정규직이 되고 오상식은 승진하고 - 누구나 그런 일이 실제로 가능하면 좋겠다는 '대책없는 희망' 하나 쯤은 간직하고 사니까.
'한국 드라마 이야기 > 미생'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생, '우리'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 직장인의 판타지 (0) | 2014.12.22 |
---|---|
미생, 오상식을 떠나보낸 장그래가 아직 모르는 것 (4) | 2014.12.20 |
'미생' 최고 시청률이 고작 7퍼센트라고? (15) | 2014.12.08 |
미생, 마부장같은 부당함을 이겨내는 힘 - '우리'라는 이름의 동질감 (1) | 2014.12.07 |
미생, 아무에게도 말하기 힘든 고단한 안영이의 삶 (0) | 2014.12.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