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우리'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 직장인의 판타지

Shain 2014. 12. 22.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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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른들은 직장생활을 위한 몇가지 충고를 말해주곤 했다. 직장에서 마주치는 상사나 동료들에게 감정을 숨기고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말고 하기싫은 일도 참고 원만하게 나쁜 사람과도 잘 어울리라고 했다. 덧붙여 어떤 남자 선배는 여자들은 직장에서 시키는 커피 접대나 가벼운 성적 농담 정도는 받아넘길 줄 알아야한다는 다소 희한한 조언을 큰소리로 떠들기도 했다. 직장이 학교와는 다르다는 정도는 누구나 알고 있다. 학교에서도 때로 불합리한 관습을 참고 넘겨야하는데 직장이라고 다를까. 나는 뭔가 비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그들의 조언을 들으며 마음 한편에선 그래도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비슷하지 않을까 - 막연히 그런 기대를 품곤 했다.


원인터를 나와 오상식과 함께 일하게 된 장그래. 어쩌면 장그래의 '우리 회사'가 우리가 희망하는 직장은 아닐까?


그런데 직장생활 2년차에 그 '인생 선배'들의 말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일이 힘든 건 참을 수 있지만 사람이 힘든 건 답이 없다. 일 스트레스와 사람 스트레스는 달랐다. 업무에 공을 들이다 못해 부하직원에게 마구 성질부리며 못된 짓하는 '미생'의 마부장(손종학)같은 상사나 사람좋은 척 웃으며 직원들을 이간질하고 함부로 해도 된다 싶은 사람에겐 아무 말이나 막하는 성대리(태인호)같은 유형의 인간들은 정말 대응하기 힘들다. 그 선배들의 조언은 직장 동료들과 적당히 친해지고 적당히 경계하라는 말이었다. 최소한 사람 때문에 힘든 일만은 피해보라는 요령인이지.


드라마 '미생'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장생활을 떠올렸을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인생의 대부분을 직장에서 보내고 직장에서의 삶이 생계를 비롯한 많은 것을 결정하기에 '평생직장'을 꿈꿨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현대사회의 직장은 과거 보다 더 냉랭하고 정규직 보다 비정규직이 훨씬 많다. 무엇 보다 이제는 일을 하는 재미나 일을 하는 의미를 느끼기 힘든 시대가 되어버렸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속을 터놓을 필요도 없고 그들의 세세한 속사정까지 알 필요는 없어도 가끔씩 그들도 나와 같은 처지의 동료고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임을 느끼고 싶은데 우리 시대의 직장에선 '우리'라는 느낌이 실종되어 버렸다.











'우리'가 실종된 직장에서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혼자서 힘든 시간을 버텨야한다. 친절하게 인사하는 얼굴 뒤에 숨겨진 진짜 '사람'들은 모두 어디갔을까. 드라마 '미생'은 수많은 직장인들의 마음을 잔잔하게 그려냈다는 점에서 큰 공감을 얻었다. 버티고 살아남고 완생이 되기 위해서 겪어야하는 시간들 - 그 시간 속에서 만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 드라마 '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우리'다. 혼자가 아닌 우리들이 함께 힘겨운 이 시대를 함께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우리 회사, 우리 팀, 우리 입사동기들, 우리 집의 가치를 가장 소중히 여기는 오상식(이성민)은 직장인들이 원하는 리더상인 동시에 판타지라고 말이다. 오상식같은 리더를 만나고 싶어도 내가 오상식이 되고 싶어할 사람은 거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고졸 신입사원에게 차근차근 일을 가르쳐주고, 내 일이 아니지만 억울한 경우를 당하는 직원을 편들어주고, 2년짜리 계약직이 정규직이 될 꿈을 꿀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부하직원의 잘못을 감싸기 위해 싫은 상사에게 고개를 숙이는 그의 모습은 모든 직장인이 바랄 만한 모습이지만 내 한몸 건사하기도 힘든 시대에 그런 리더가 나타나기는 쉽지 않다.


그들이 판타지인 걸 알지만 우리는 현실과 희망을 동시에 보았다.


마찬가지로 계약직 장그래(임시완)가 큰 실적을 내고 장그래의 정규직 채용을 위해 이리 저리 찾아다니며 노력한 선차장(신은정), 안영이(강소라)와 사내 게시판에 글을 써 분위기를 조성한 한석율(변요한), 장그래의 실적을 정리해준 장백기(강하늘)의 노력도 판타지라고 말한다. 안그래도 비정규직보호법으로 무기계약직이 늘어날까봐 최대한 빨리 계약해지하려는 기업에게는 훌륭한 인재 한명 보다 계약직의 정규직 채용 사례를 남기지 않는 일이 훨씬 중요하다. 오차장의 말처럼 '끝을 알면서도 시작하는 일'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지만 가능성없는 일이란 걸 대부분 알고 있었다. 


오차장이란 리더가 보여준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뤄냈다. 자원2팀의 미운오리새끼였던 안영이는 하대리(전석호)의 발을 걸어 넘어트리는 오차장에게 작은 위안을 받고, 워킹맘 선차장은 오차장과 신입사원들의 도움으로 용기를 얻었다. 화장실 옆자리의 영업3팀이 최전무(이경영) 라인 박과장(김희원)의 비리를 캐고 사장까지 격려하는 요르단 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성과를 이룬 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힘이었다. 생각해보면 직장생활에서 꼭 필요한 것이 승진과 월급 만은 아니지 않은가. 비록 오차장의 스타일이 회사와는 맞지 않더라도 누군가 한 사람 오차장처럼 격려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직장인들이 많을 것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쓸쓸해보이는 천과장처럼 '우리'를 느끼지 못한다.


그들이 얻은 가장 중요한 가치는 '우리'였다. 오차장은 퇴사하고 장그래는 계약해지 당해도 그들의 우리는 무너지지 않았다. 오차장이 김선배(민복기)와 함께 차린 이상네트웤스에 좌천당한 김부련(김종수) 부장을 사장으로 부르고 장그래를 입사시키고 김동식(김대명) 대리가 찾아온다. 혼자 원인터에 남은 천과장(박해준)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였던 이유는 이제 더이상 천과장 옆에 '우리'라고 부를 수 있는 동료들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직장인들이 그렇게 일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미생' 마지막회에서 가장 뭉클했던 장면은 장그래의 정규직 임용 실패가 아니라 천과장의 뒷모습일지 모른다. 우리 사회의 직장인들 다수가 '우리'가 없는 그런 모습으로 직장을 다니고 있으니까.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월급을 받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일을 하고 일에 재미를 느끼고 그 길을 혼자 가지 않는 것이다. 늘 절박하게 매달리고 주눅들어 있고 무시당하는 일에 익숙하던 장그래가 이제는 원인터 직원 보다 자신있게 일을 처리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오차장에게 농담을 던진다. 장그래의 새로운 길은 '우리'들의 길이다. 비정규직 직원으로 시작한 드라마 '미생'이 현실에선 버려진 오차장의 판타지였다면 '미생'의 다음 이야기는 그 판타지가 현실에서 살아남는 모습이 되리라. 뭐 한석율처럼 성대리가 불륜녀의 남편(오정세)에게 얻어맞는 장면도 속시원하긴 했지만 그런 낙을 보려 참는 것도 한두번이지 장그래는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았다.


오상식과 장그래가 달려가는 새로운 길. 드라마 '미생'의 인기 비결은 그들의 판타지가 희망을 보여주었기 때문아닐까?


많은 이들이 이 드라마의 인기비결을 꼽지만 나는 '미생'이 공감을 받은 것은 오상식과 장그래의 판타지를 현실에서 보고싶다는 바람이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스펙에 매달리는 인턴들, 기업과 거래하는 수많은 갑과 을, 갖가지 핑계로 왕따당하는 사람들과 회사를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 - 우리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인 동시에 안쓰러운 풍경들이 직장인들을 울리고 웃겼다. 일은 원래 사람이 살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언제부터 우리가 일의 노예가 되어 휘둘리기 시작했을까. 우리 시대는 직장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한 시대다. 장그래의 일은 여전히 힘들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독백과 함께 오차장과 길을 달려가는 장그래의 밝은 모습에 우리들은 희망을 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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