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미생

미생, 오상식을 떠나보낸 장그래가 아직 모르는 것

Shain 2014. 12. 20. 07:29
728x90
반응형

서른살이 되기전에는 서른살 인생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했던가. 세상에는 직접 경험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요즘처럼 정보가 널리고 경험쌓기가 쉬워진 세상에도 '연륜'은 쉽게 무시할 수 없다. 재벌3세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이 무섭다'는 말의 진정한 뜻을 잘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미생'의 장그래(임시완)는 이제 겨우 회사에 첫발을 디딘 신입사원으로서 최전무(이경영)와 오상식(이성민)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을 것이다. 오차장이 단순히 장그래의 정규직 채용 만을 위해 최전무의 중국 사업을 선택한 것이 아니듯 최전무 역시 오차장을 제거하고자 계략을 꾸민 것이 아니었다. 장그래는 한참 어린 '미생'이라서 그들의 싸움을 완전히 알지 못했다. 오차장이나 최전무나 모두 완생 아닌 미생이라는 것을 몰랐다.

 

장그래의 녹취 사건으로 중국 사업은 실패하고 최전무는 떠난다. 오차장도 회사에 떠밀려 사표를 내게 된다.

 

누군가의 말대로 직장이 전쟁터라면 오차장은 로마의 백부장같은 존재다. 비록 영업3팀의 직원이 백명이 아니라 3명 뿐이지만 맞서 싸우며 뛴다는 점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 최전무는 그 보다는 훨씬 높은 지위에 있다. 최전무는 여러 명의 백부장을 거느린 수장으로 백부장을 통해 훨씬 큰 전쟁을 지휘하는 사람이다. 신입사원 장그래가 치뤄야할 승부에 비하면 오차장이나 최전무가 감당해야할 승부는 훨씬 규모가 크다. 애초에 오억불짜리 사업이 계약직 신입사원 하나를 위한 것이란 생각 자체가 장그래가 미숙하다는 증거다. 장그래가 생각하는 것 보다 오차장은 최전무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다.

 

최전무는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직장상사다. 오직 회사를 위해서 28년 동안 일했고 원인터의 중국 사업 기반을 쌓았다. 다른 어떤 나라와의 사업 보다 중국과의 사업이 어려운 이유는 '꽌시' 때문이었는데 그 '꽌시'가 뇌물, 인맥, 인정같은 한 단어로 표현이 안되는 특수한 문화라 때로는 상대 업체에게 두둑히 돈을 찔러주기도 했고 반대로 받기도 했다. 희생이 필요할 때는 과감히 결정했다. 그의 그런 사업 방식은 원인터의 사장(남경읍)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가치관이 오차장과 다른 최전무가 오차장을 끌어들인 이유는 자신의 방식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을 것이다. 최전무는 승패도 패승도 싫고 같이 승승하자는 말로 오차장을 안심시킨다.

 

결국 원인터의 완생이 되지 못한 최전무와 오상식.

 

인사발령 후 오차장과 따로 만난 최전무는 '두 발을 땅에 딛고도 별을 볼 수 있는 거인'이 회사가 원하는 임원이라 말한다. 자신이 그동안 두 발을 땅에서 떼고 일해왔다는 것이다. 최전무는 오차장과 달리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백프로 신뢰해줄 '우리'가 없었다. 오로지 실적과 승부에 집착하는 동안 박과장(김희원)같은, 곪아터진 상처가 나왔고 오차장처럼 일잘하고 믿음직한 부하직원은 어느새 떨어져 나갔다. 최전무는 자신을 한단계 더 발전시키기 위해 오상식을 품어보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원인터 직원들이 두려워하던 최전무 역시 회사에 완전히 뿌리내린 '완생'은 아니었다.

 

반면 오차장은 업무 능력은 누구 보다 뛰어나고 부하직원들을 '우리'로 감싸줄 수 있는 아량넓은 상사지만 사내 정치에는 능숙하지 못했다. 오차장의 업무 스타일은 환영받지 못했고 계약직 이은지(서윤아)의 죽음은 최전무를 멀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이 이끄는 영업3팀이 밀리면 밀릴수록 부하직원들도 승진에서 멀어질 수 밖에 없다. 리더 때문에 모두가 완생이 되지 못하고 밀려날 수 있다 - 진정한 리더란 팀을 끌고가는 사람이지 제자리에 머물게 하는 사람이 아니다. 최전무와의 겨루기는 지금 보다 더 나은 리더가 되기 위한 발판이자 '우리' 장그래를 품고 갈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결국 완생이 되기 위해 버티던 최전무와 오차장은 원인터를 떠난다. 장그래의 녹취로 불안해진 석대리(장준휘)는 본사에 보고했고 본사에서는 지나치게 많이 책정된 중국 업체의 수익을 지적하고 나섰다. 아무리 그것이 지금까지 원인터에 큰 이익을 안겨준 최전무 방식이라 해도 최전무를 견제하는 쪽에서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최전무가 28년간 몸담았던 회사는 최전무를 한직으로 밀어낸다. 오차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최전무가 물러나 중국과의 사업이 어려워지자 그 책임을 오차장에게 뒤집어 씌우고 오차장에게 일을 주지 않는 방식으로 기어코 사표를 내게 만든다. 오차장과 최전무가 그동안 회사를 위해 세운 실적 따위는 '갑' 노릇하는 회사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 과거의 일이다.

 

오상식과 마지막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장그래는 주저앉아 소리내어 운다. 오차장이 지난 2년 동안 장그래를 가르쳤던 기억이 떠오르고 오차장이 주고 간 슬리퍼가 생각나고 자신의 경솔한 말한마디로 시작된 오차장의 퇴직이 너무나 슬퍼서 울었을 것이다. 자신을 입사시켜준 최전무와 자신의 멘토인 오차장을 회사에서 밀려나게 만든 자신의 미웠을 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보며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해고되고 퇴사했던 직장동료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먹먹한 2년차 계약직 사원의 눈물은 그저 버텨야하는 회사 생활의 서글픈 모습이다.

 

오상식과 마지막 인사를 한 장그래는 죄송하다며 소리내어 운다.

 

그러나 장그래는 아직 잘 모를 것이다. 오상식이 굳이 장그래를 불러 '너 때문 아니'라 말했던 이유, 울그락 불그락 화를 내며 '책임을 지는 것도 그럴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며 다그쳤던 이유를 모를 것이다. 최전무와 오차장이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각자 떠안을 몫이 있다는 것을 장그래가 아직은 그 책임을 나눌 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오차장의 말은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장그래를 위로하기 위한, 곧 퇴사하는 사람의 호기로운 빈말이 아니라 그 위치에 서보기 전에는 절대 알 수 없는, 그들 만의 자긍심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먼저 앞서간 선배의 격려가 '아 이것이구나'하며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오차장이라고 회사를 떠나는 순간이 겁나지 않을리 없다. 젊은 시절부터 열심히 노력하며 생계를 꾸렸던 곳이고 세 아이와 아내를 책임지기 위해서 직장이 꼭 필요한 오상식이다. 장그래를 보낸 후 아파트 앞에 주저앉아 기운잃은 표정으로 시간을 보내는 오차장의 마음은 무겁다 못해 가라앉기 직전일 것이다. 그래도 그는 선차장(신은정), 고과장(류태호)과 신입사원들, 영업3팀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장그래를 탓하며 떠넘길 수도 있을 마음의 무게를 굳이 자신이 떠안고 가는 선배의 마음 - 젊은 장그래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그의 호기가 최선을 다한 자의 개운함이라는 것을, 아직 버텨야하는 사람들을 위한 위로라는 것을 장그래는 겪어보기 전엔 모른다.

 

퇴직이 무섭고 겁나지만 오상식은 최선을 다했다. 아직 버텨야하는 사람들을 위해 환하게 웃어준 오상식의 마음.

 

오차장과 최전무의 원인터 생활은 이렇게 마무리되겠지만 오차장의 말대로 장그래는 끝을 알면서 시작할 것이다. 계약직은 정규직이 될 수 없기에 장그래는 오차장의 선택도 최전무의 승부수도 겪지 못할 수 있다. 어쩌면 직장이라는 전쟁터를 나와 세상이라는 지옥에 내려온 오차장의 책임감을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완생이 되기 위해 절박하게 노력하는 장그래라면 깨닫게 될 것이다. 누구 잘못이든 간에 누구나 바둑판의 돌이 되어 원치 않게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 최전무와 오차장은 장그래의 잘못으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그들 만의 바둑을 두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말이다. 원인터를 떠나는 순간을 겪어보면 장그래도 웃어주는 마음을 알게될 것이다.

 

드라마 '미생'은 마지막회를 앞두고 슬픈 이별을 했다. 장그래를 진심으로 걱정해준 깍쟁이같은 장백기(강하늘), 이제는 한층 회사생활이 능글능글해진 안영이(강소라), 성대리(태인호)의 은밀한 만남을 보고 깜짝 놀란 한석율(변요한) - 성대리 게이설이 떠돌고 있다던데 - 그리고 진짜 대기업에서 튀어나온 것같았던 수많은 원인터의 직원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 '미생' 시즌2를 제작한다고 해도 멤버가 같으리란 보장이 없으니 더욱 그렇다. 마지막회를 앞두고 보니 더할 나위 없었던 드라마인 만큼 많이 그리울 것같다. 세상 모든 미생(未生)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던 '미생'의 끝을 기쁜 마음으로 지켜봐야할 것같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