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속 문화 읽기

영화 '국제시장'으로 불거진 허지웅 논란을 보며

Shain 2014. 12. 2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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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에 태어나서 영화 '국제시장'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국제시장'에 등장한 사건들은 아버지에게 할말이 많은 추억거리다. 고향에서 차를 타고 10분 정도만 가면 전쟁 때 피난왔던 북쪽 사람들이 자리잡은 판자촌도 있었다고 했고 건너 마을에는 월남전에 파병갔다 일찍 죽은 사람도 있단다. 뭐 건너건너 아는 어르신들 중에는 독일에 건너갔던 노동자가 있고 누구는 이산가족찾기를 했다니 아마 아버지 또래에겐 그 영화의 소재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과거고 아픔일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자식들이나 손자들과 그 시절의 이야기를 오래 하는 경우는 드물다. 판자촌이 뭔지 모르는 손자에게 피난민의 판자촌을 설명할 방법은 별로 없었을테니까.


과거에 대한 향수를 담은 영화 '국제시장'. 영화에 대한 감동 보다 정치적 논란이 더 큰 이슈가 되고 있다.


요즘 포털 뉴스를 읽어보면 이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논란이 한참이다. 일부 종편에서 이 영화를 극찬한다는 글도 읽었고 평론가 허지웅은 이 영화를 '선동'이라고 했다느니 '토 나온다'고 했다느니 해서 시끄러웠고(알고 보니 이 말은 영화평이 아니라 다른 주제에 대한 말이었다는데 한 종편에서 왜곡했다고 한다) 홍가혜 논란으로 유명한 모 스포츠신문 기자가 허지웅의 비평에 또 비평을 해서 다시 논란이 일어났다. 급기야 영화 '국제시장'에 대한 비평은 진보 보수 간의 갈등으로까지 비화되는 느낌이다. 도대체 이 영화의 어떤 점을 양쪽 진영에서 이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영화 자체로만 보면 '국제시장'은 꽤 관심가는 영화다. 배우 황정민, 김윤진, 정진영, 라미란같은 좋은 배우들의 연기 만으로도 호기심이 생긴다. 그런데 영화의 관점이나 소위 '보수단체'들이 이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니 이 논란의 요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가 그냥 과거에 대한 향수 혹은 노년세대에 대한 이해 정도로 끝났으면 좋았을텐데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묘사된 과거를 특정 정치적 이슈를 긍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이렇게 고생했다는 감동에서 끝났으면 충분했을 걸 굳이 왜 부정적인 논란을 불러일으켰나 싶다.


허지웅이 제기한 비평은 영화 자체에 대한 논란도 있지만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논란이라고 보는게 옳을 것같다. 일부는 역사적 고통만 나열하고 그 시대의 문제점을 성찰하지 않는 영화의 전개방식도 문제라고 했지만 어쩌면 그렇게 고통스런 시대를 산 사람들이 눈앞의 현실 밖에 생각 못하는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른다. 죽고 사는 일이 급박했던 그들의 시대에는 생존의 위기 만을 감당하기도 벅찼기 때문에 그렇게 살았고 영화는 그 시대 정서에 맞춰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주인공이 그 시대 사람이니까 영화에 시대적 비판이 모자란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영화를 그냥 과거의 향수로 받아들이지 않고 이념적인 주장을 펼쳤다. 굳이 '국제시장' 세대의 고통과 젊은 세대의 고통을 비교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과거에 전쟁이 있었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그들 보다 덜 힘들게 산다는 단순 비교는 곤란하다. 과거 세대가 정치적 옳고 그름을 따지기 힘든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젊은 세대가 그 방식을 꼭 받아들여야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목숨걸고 돈을 버는게 옳았다고 해서 현대에서도 그 방식대로 살아야하는 법은 없다. 누구나 한 개인에게는 자기 만의 역사가 있는데 영화 한편에 빗대어 세대 간의 다른 삶을 평가하려 들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행위인가.


사실 감동이란게 그렇다. 감동이라는게 갑자기 '찌르르'하고 예상치 못하게 오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어떤 사건이나 컨텐츠를 보고 감동하는 것은 그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을 때 가능하다. 너무나 슬프고 가슴아픈 이야기를 보고도 불편한 감정만 느낄 뿐 감동할 수 없는, 빡빡하게 사는 사람들도 세상엔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를 보여주고 '애국심'을 운운하면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아버지 세대의 고통을 영화로 본다고 해서 그들과 똑같은 정치적 판단을 해야한다고? 그건 말그대로 웃기는 소리다. 기껏해야 아버지 세대가 저런 일들을 겪었는지 몰랐다 정도의 대답이 나올 것이다.


따지고 보면 '국제시장' 시대의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은 고스란히 현재의 젊은 세대가 물려받고 있다. 그때는 그래도 죽도록 노력한 만큼 돈을 벌고 중산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시기였으나 현재는 피나는 노력 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 시대다. 기계적으로 공부하고 아르바이트하면서 스펙쌓고 정규직이 되기 위해 기를 쓰고 비정규직에서 벗어나고자 눈치보고 주거비와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잠도 제대로 못자는 이 시대의 젊은이들도 충분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과거의 젊은이들처럼 전쟁을 겪지 않았다고 해서 현재의 젊은이들이 허투루 살고 있는게 절대 아니다.


현대의 젊은이들도 충분히 고통을 겪고 있다. 과거를 통해 현실을 외면하는 정치적 주장은 옳치 않다.


'미생(未生)'이란 인기 컨텐츠의 제목처럼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들이란 말까지 들으면서 지독하게 살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처럼 고생을 해보지 못했다느니 국가의 가치를 모른다느니 하는 말이 얼마나 먹히리라 생각하는가? 이 시대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과거를 보며 느끼라는 말이 얼마나 무의미하게 들릴 것인가? 그들에게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는 한번쯤 볼만한 과거의 이야기이자 아버지와 진심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지언정 젊은 세대의 삶을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국제시장'을 두고 벌어진 이념논란이 짜증나는 건 누군가가 젊은 세대에게 과거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라 강요하고 떼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젊은이들에겐 직접 겪지 못한 과거 보다 훨씬 더 와닿는 진짜 현실이 더욱 가슴아플 수 밖에 없다. 작게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사랑부터 크게는 취업준비생이나 비정규직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무서운 사회의 무게가 오늘도 젊은 세대를 짓누른다. '국제시장'이 한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늙은 아버지들을 위한 영화로 남았더라면 현실에 대한 관점이 부족해도 그럭저럭 좋은 컨텐츠였을 것을 - 우리 나라를 일으켜 세운 아버지들의 고생을 표현한 영화를 통해 정권을 옹호하고 현세대를 비난하려 했던 그들의 진영논리가 답답하게 다가온다. 현세대가 아버지 세대의 고통을 그대로 물려받았음은 잊어버리란 뜻인가?


이 시대의 젊은이는 이미 많은 것을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 '삼포세대'라 불리는 그들은 출산, 연애, 결혼을 포기하고 낮은 임금과 비정규직을 받아들이며 그 조건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보려 발버둥치고 있다. 우리 시대의 젊은 세대가 무슨 태평양같은 이해력과 포옹력을 날 때부터 갖춰야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 어째서 충분히 고생하고 있는 우리들이 아버지 세대의 향수를 보며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아버지들에 비해 나약하단 말까지 해야하나. 그들의 무지한 이념 논란이 서로 대화해야할 세대 간의 갈등을 더욱 부추기는 것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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