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은 13, 14, 15회가 연속 방송됩니다 > 원빈 홍씨의 무덤은 원래 인명원(仁明園)이라는 곳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원(園)'이라는 명칭이 '원빈묘'로 강등되었습니다. 무덤의 '지위'가 '원'에서 '묘'로 강등된다고 해서 딱히 달라질 것은 없을 거 같지만 옛날 사람들은 은근히 신경 쓰였나 봅니다. 그 문제로 이러니 저러니 하다 결국 '원빈묘'로 강등시키고 맙니다. 이제는 죽은 사람인 홍국영도 없으니 더 이상 거리낄 없었겠죠. 여동생의 결혼에 홍국영은 굉장히 신경을 많이 쓴 듯합니다. 기껏 후궁의 결혼인데도 가례를 치르고 삼간택을 하고 해 줄 수 있는 건 다해서 혼사를 준비했죠. 당시 삼간택으로 들어온 후궁 중에는 화빈 윤씨도 있습니다.
화빈은 삼간택 후궁 중에서도 가장 불행한 인물입니다. 혼례를 치렀는데 상상임신을 한 것입니다. 아이는 낳지도 못한채 열달 넘게 궁에 있다가 사라졌죠(아마도 조용히 사라진 것을 보아 끝이 좋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당시 임신과 출산은 후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습니다. 아직 등장하지 않은 효의왕후는 아주 어린 나이에 혼례를 치렀는데 천연두에 걸려 출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린 나이가 아님에도 출산 포기 선언을 하고 삼간택을 하계 된 것입니다. 아이를 낳으라는 윗전들의 간섭(실제로 개입한 사람도 많습니다 - 정순왕후, 혜경궁 등)도 간섭이지만 진짜로 출산은 중요한 문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이가 제법 많았거든요.
효의왕후는 그외에도 꽤 마음고생을 했는데 사이가 안 좋은 원인 중하나였던 삼간택 날 원빈은 이 특별한 후궁이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대놓고 무시하거나 인사를 안 받기도 하고 당시 성덕임(이세영)이 마음이 불편했을 상황이 여러 번 있었죠. 사실 그 때문에 덕임이 정조(이준호)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평가도 있습니다(실제로 효의왕후와 정조는 굉장히 친했거든요). 정조가 당시 혼인 후에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은 20대 중반이 한참 넘은 나이였습니다. 효의왕후는 그 후 한참 동안 홍국영에 의해 암살 의혹에 시달립니다. 심정은 이해하지만 당시 원빈은 일설에 의하면 종기 때문에 고생한 것 같습니다(정조가 남긴 글에서 나온 것).
아무튼 원빈 홍씨의 소장품을 보면 보통 물건이 아니구나 싶습니다. 지금은 대부분 일본으로 넘어가 남은 것이 별로 없다지만 옥 수납함, 화장품 그릇, 은제 합 등 화려함이나 아기자기한 모습이 요즘 봐도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보관 상태가 좋아 귀하게 다룬 물건이구나 싶습니다. 홍국영의 위세가 당시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 했을 정도니 두말할 것 없죠. 어린 여동생이 걱정돼서 그랬던 것인지 일찍 죽은 원빈을 위해 꽤 신경을 쓴 것같습니다. 그 안쓰러운 여동생 원빈은 그렇게 하루아침에 사라지는 운명이 되었죠. 홍국영이 오래 살았으면 홍국영 천하가 꽤 오래 유지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원빈이 죽는 바람에 새로운 아이를 입양까지 하려던 권세는 그렇게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대체 홍국영의 주변인물들은 왜 죽었나
원빈(정서경)이 죽은 후 홍국영(강훈)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기 시작합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사람들은 놀라지만 이건 아무래도 홍국영아 저지른 일 같습니다. 당시 효의왕후(아무래도 표예진 같은데 아니면 화빈 같은 배역이 아니면 왕후 역할이 넘치는 것 같아서)는 홍국영으로부터 원빈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궁녀들을 고문하고 죽인 홍국영의 죄는 쉽게 용서가 안 되는 일이었죠. 침방 나인 나인 같은 가깝게 지내던 여자들을 다 끌어다 고문한 듯합니다. 그중에는 복연(이민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지금은 중궁의 위치가 비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중궁전이 비어있는 이 상태면 효의왕후가 등장해야 할 텐데 싶긴 하죠.
아무것도 모르고 궁중에 떨어진 노리개 장식만 발견한 성덕임(이세영)은 깜짝 놀랍니다. 변고가 생긴 건 알겠는데 누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원래 궁안은 넓어 누구 하나 사라지면 흔적찾기가 힘든 곳입니다. 아무리 홍국영이 인명을 경시하고 사람의 죽음에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성격이라도 그 정도까지 잔인할까 싶지만 이미 원빈의 문제로 눈이 뒤집혔다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다 싶긴 합니다. 사람들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요. 혹시 궁중 사람들을 숨겼던 비밀의 장소 '광한궁'에 숨겨둔 것일까요. 이미 예전에 궁녀들을 고문한 적 있으니 위치는 잘 알고 있을 테고 숨겨뒀으니 비명소리조차 잘 안 들릴 것입니다.
홍국영에 대한 역사적 평가
홍국영에 대한 평가는 후세에 와서도 갈리는데 뒷배를 믿고 너무 설쳤다는 평도 있고 역린을 건드렸다가 토사구팽 당한거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모르지만 영조(이덕화)의 책을 몰래 찢어 그 책을 숨겨준 공범(?)으로 살아남게 되었죠. 그것은 성덕임만 알고 있는 비밀입니다. 확실한 건 이 건방진 남자가 선을 너무 자주 넘었다는 것입니다. 특이 원빈에 대한 분에 넘치는 예우는 아무리 지적받을만한 문제였습니다. 물론 화완옹주(서효림)와 정후겸(권현빈)을 처리한 것은 공적이라면 공적인데 원래 화완옹주는 분에 넘치는 대접을 자주 받았고 사치도 부렸기 때문에 언젠가는 처리될 문제였습니다.
홍국영은 점점 더 마쳐갑니다. 나중에는 모든 직책에서 끌어내리게 됩니다. 정순왕후(장희진), 혜빈(강말금), 효의왕후를 비롯그 한 그 누구도 홍국영을 편들어주지 않습니다. '흑두봉조하'가 된 것입니다. 원래 봉조하는 백발이 성성한 나이 든 인물에게 내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말하자면 명분만 있는 직급이란 말이죠. 궁중에서 아무 일도 하지 흑발의 봉조하라니 이건 그냥 물러나 달라는 뜻입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어린 시절 동무란 이유 만으로 건방지고 선 넘는 일도 참아왔는데 어린아이를 후궁으로 들이고도 참았는데 정조는 더 이상은 참기 힘들게 됩니다. 결국 자신 사퇴 형식으로 물러나게 되죠.
평소 정조는 술 마시기를 즐겼다고 합니다. 정약용이 술을 싫어해도 권했다고 하죠. 은전군을 사사하라 명하고 술 마시는 정조는 좀 안쓰럽기도 합니다. 평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았던 후궁의 자식인데 좀 살려두면 어때서라는 생각도 들지만 화근을 잘라야 한다는 그 마음도 이해는 갑니다. 작은 일에 개의치 않는 담대한 성격인 것은 분명하죠. 뭐 어떻게 됐는지 알 수 없다는 홍국영은 미쳐서 죽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에서 봉두난발에 거지꼴로 굼벵이를 주워 먹고 눈동자에 검은 점이 여러 개 있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썰이긴 하지만 여동생 때문에 죽은 남자의 안타까운 최후죠. 그렇게 남에게 냉정하던 남자가 여동생이 죽었을 때 보여준 정이라니. 혜경궁의 글에는 홍국영에 대해서 '매우 잘 생기고 언변이 뛰어나서 미모로 내 아들을 홀렸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쩐지 씁쓸하고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드라마와 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가살, 600년 동안 숨어사는 불가살의 원한 (0) | 2022.01.08 |
---|---|
옷소매 고운 끝동, 정조와 의빈 그리고 조용히 살다간 궁녀들 (0) | 2022.01.05 |
옷소매 붉은 끝동, 덕로 홍국영은 왜 원빈을 후궁으로 들였을까 (0) | 2021.12.24 |
옷소매 붉은 끝동, 일월오봉도와 금등지사 - 사도세자의 비밀 (0) | 2021.12.18 |
태종 이방원, 다시 돌아온 태종 이방원 나는 역적이다 (0) | 2021.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