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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시청하다 보면 늘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바로 '역사는 승자의 것'이란 단순한 진리죠. 정의롭고 대의를 품었으며 국가가 원했기 때문에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왕'이기 때문에 정의롭고 영웅적인 인물인 것입니다. 아쉽지만 우리 나라 사극은 그 '이긴 자'들을 미화하는 형태를 벗어난 적이 거의 없습니다. 누군가를 해치고 왕이 되었을 지라도 그들의 야망이나 욕심이 '대의'라 묘사되곤 합니다.
'KBS 근초고왕'의 부여구(감우성)는 초고대왕의 뜻을 이으라는 아버지 비류왕의 격려를 듣지만 큰형 부여찬(이종수)의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부여찬, 부여준(한진희), 해소술(최명길), 부여산(김태훈) 등은 사서에 의하면 패자들입니다. 작가는 근초고왕에게 백제를 차지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그들을 최소한의 동정도 없는 악인으로 만들어버리는군요.
어린 시절부터 나투의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단 이유로 요서지역을 떠돌며 소금장수를 하던 부여구의 운명을 시청자는 동정하게 될 것이고 권선징악의 차원에서라도 부여준, 부여찬과 해씨 일족의 몰락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고국원왕 사유(이종원)의 역할 역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고국원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패자입니다.
강성한 고구려의 태왕으로 미천왕의 장자로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이지만 진연의 침략으로 제 1왕후와 어머니, 아버지의 시신까지 빼앗긴 불행한 인물입니다. 부여화(김지수)를 제 2왕후로 얻어 백제에 대항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내에 집착하는 정신병자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부강한 백제를 꿈꾸던 백제 비류왕에 비해 백제를 정복하고자 하는 고국원왕의 의지는 어쩐지 하찮게 보이기도 하는군요.
우리 나라의 성씨는 중국과 비슷하게 최근엔 모두 한자리입니다만 '선우', '황보'씨를 비롯한 몇몇 성은 아직까지 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죠. 남은 사료를 볼 때 이와같은 두 자리 성이 백제 때는 매우 흔했던 것 같습니다. KBS의 해명대로 '부여(扶餘)'라는 성을 '여(餘)'로 줄이는 방식을 쓰는 건 중국식이라는 지적이 틀린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택지적(砂宅智積), 흑치상지(黑齒常之) 같은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에도 일부 언급했지만 백제는 여덟 개의 귀족 부족이 있어 이들을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강성할 때는 백제의 왕들은 그들을 견제해야하기도 했죠. 부족이 연합해 국가를 세운 신라, 백제 등은 각각의 부족이 하나의 성씨로 정착해 귀족가문이 되었을테고 그들은 쉽게 약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제의 8대 귀족 성은 사서에 따라 조금 달리 기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사(沙), 연(燕), 협(協),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묘(苗, 또는 백) 등입니다. 沙(사)씨는 沙咤(사타), 沙宅(사택) 그리고 眞(진)씨는 眞慕(진모), 木(목)씨는 木(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단성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따라 사씨, 진씨, 목씨 등으로 변합니다. 다른 성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이 현대까지 전하는 성도 적어 어떻게 부족이름이 성으로 정착했는 지는 알 길이 없죠.
일본 사서에 복성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장한 인물은 백제 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라고 합니다. 백제와 일본이 교류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백제 왕실이 일본인의 선조라 밝혀진 경우도 있으니 그들의 '복성' 문화는 백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없지만 관련은 있을 듯 합니다.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에게는 승자이지만 백제는 신라에게 패자라 남은 기록이 적습니다.
대체로 부여씨, 해씨, 진씨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사씨, 연씨, 백씨는 남쪽의 토착세력, 목씨는 마한의 세력인 목지국 출신 사람들로 추정하고, 사택씨는 백제 후기에 강성했던 집안입니다. 백제가 패망하던 의자왕까지도 복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걸로 보아 복성이 공존했던 것 같은데 현대인이 알아듣기는 쉬워도 '부여구'를 '여구'로 바꾼게 과연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
어재 방송분에선 백제를 아우르는 남당회의의 분열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사씨 세력의 수장인 달솔 서충선은 진씨의 편을 들고 연씨 세력의 수장인 달솔 연도숙은 해씨 편을 들며 대등한 위치로 의견을 내놓고 충돌합니다. 국씨 세력의 수장 국나호는 딱히 지위가 묘사되지 않지만 달솔이 아닌 것으로 보아 눈치를 보는 수 밖에 없는 약한 부족인듯 합니다. 그는 남당에 나온 자들 중 말수가 가장 적은 편입니다.
부여구를 태자로 삼기로 한 비류왕은 부여구의 외가인 진씨 가문에 힘을 실어주고 중립적인 왕자 부여휘(이병욱)에게 태자의 권한인 위사군 통솔권을 맡깁니다. 진정의 장자이자 부여구의 사촌인 진승에게는 남당에 참여할 수 있는 달솔의 자격을 주지요. 위례궁주 부여준이 왕자와 대등한 대접을 받는 걸로 보이고 남당에도 참여하지만 '직위'는 없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백제의 관제가 정비된 건 부여준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사반왕의 왕위를 찬탈한 바로 그 인물, 고이왕 때입니다. 제1품이 좌평, 제 2품이 달솔, 제 3품이 은솔, 제 4품이 은솔, 제 5품이 한솔, 제 6품이 나솔이었습니다. 진정의 관직이 좌평인데 그 아들까지 달솔인 건 엄청난 특혜라 볼 수 있죠. 해소술의 사촌 오라버니이자 해씨 세력의 수장 해녕이 홀로 좌평인 것에 비하면 세력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해씨가 위협을 느낄 만한 이런 상황에서 부여준과 손을 잡은 건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백제 귀족의 의견이 반으로 나뉘고 모로성을 차지한 대장군 진고도(김형일)까지 진씨의 편이니 모로성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진격하면 해소술과 해씨는 바로 패권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구는 이렇게 자신의 지지세력이 다수 있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왕실에서 제거 당하고 첫번째 싸움에서 패합니다.
'KBS 근초고왕'의 부여구(감우성)는 초고대왕의 뜻을 이으라는 아버지 비류왕의 격려를 듣지만 큰형 부여찬(이종수)의 모함에 빠져 모진 고문을 받습니다. 그를 사지로 몰아넣는 부여찬, 부여준(한진희), 해소술(최명길), 부여산(김태훈) 등은 사서에 의하면 패자들입니다. 작가는 근초고왕에게 백제를 차지할 '동기'를 부여하기 위해 그들을 최소한의 동정도 없는 악인으로 만들어버리는군요.
아들 부여찬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남편 비류왕을 죽인 해비 해소술
어린 시절부터 나투의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단 이유로 요서지역을 떠돌며 소금장수를 하던 부여구의 운명을 시청자는 동정하게 될 것이고 권선징악의 차원에서라도 부여준, 부여찬과 해씨 일족의 몰락을 바라게 될 것입니다. 고국원왕 사유(이종원)의 역할 역시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고국원왕에게 죽음을 당하는 패자입니다.
강성한 고구려의 태왕으로 미천왕의 장자로 왕위에 오른 고국원왕이지만 진연의 침략으로 제 1왕후와 어머니, 아버지의 시신까지 빼앗긴 불행한 인물입니다. 부여화(김지수)를 제 2왕후로 얻어 백제에 대항하는 그의 모습은 마치 아내에 집착하는 정신병자를 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부강한 백제를 꿈꾸던 백제 비류왕에 비해 백제를 정복하고자 하는 고국원왕의 의지는 어쩐지 하찮게 보이기도 하는군요.
백제의 성, 복성(復姓)이다?
우리 나라의 성씨는 중국과 비슷하게 최근엔 모두 한자리입니다만 '선우', '황보'씨를 비롯한 몇몇 성은 아직까지 두 자리를 유지하고 있죠. 남은 사료를 볼 때 이와같은 두 자리 성이 백제 때는 매우 흔했던 것 같습니다. KBS의 해명대로 '부여(扶餘)'라는 성을 '여(餘)'로 줄이는 방식을 쓰는 건 중국식이라는 지적이 틀린 것 만은 아니라는 것이죠. 사택지적(砂宅智積), 흑치상지(黑齒常之) 같은 역사 속 유명 인물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전에도 일부 언급했지만 백제는 여덟 개의 귀족 부족이 있어 이들을 대성팔족(大姓八族)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의 세력이 강성할 때는 백제의 왕들은 그들을 견제해야하기도 했죠. 부족이 연합해 국가를 세운 신라, 백제 등은 각각의 부족이 하나의 성씨로 정착해 귀족가문이 되었을테고 그들은 쉽게 약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백제의 8대 귀족 성은 사서에 따라 조금 달리 기록되기도 했지만 대체로 사(沙), 연(燕), 협(協), 해(解), 진(眞), 국(國), 목(木), 묘(苗, 또는 백) 등입니다. 沙(사)씨는 沙咤(사타), 沙宅(사택) 그리고 眞(진)씨는 眞慕(진모), 木(목)씨는 木(목협)이라는 복성이었지만 단성으로 표기하는 방법에 따라 사씨, 진씨, 목씨 등으로 변합니다. 다른 성씨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이 현대까지 전하는 성도 적어 어떻게 부족이름이 성으로 정착했는 지는 알 길이 없죠.
일본 사서에 복성을 사용하는 사람으로 제일 먼저 등장한 인물은 백제 사람 수수허리(須須許里)라고 합니다. 백제와 일본이 교류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백제 왕실이 일본인의 선조라 밝혀진 경우도 있으니 그들의 '복성' 문화는 백제에서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그 부분은 장담할 수 없지만 관련은 있을 듯 합니다. 근초고왕은 고국원왕에게는 승자이지만 백제는 신라에게 패자라 남은 기록이 적습니다.
대체로 부여씨, 해씨, 진씨는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이고 사씨, 연씨, 백씨는 남쪽의 토착세력, 목씨는 마한의 세력인 목지국 출신 사람들로 추정하고, 사택씨는 백제 후기에 강성했던 집안입니다. 백제가 패망하던 의자왕까지도 복성을 사용한 흔적이 보이는 걸로 보아 복성이 공존했던 것 같은데 현대인이 알아듣기는 쉬워도 '부여구'를 '여구'로 바꾼게 과연 잘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1
왕자를 두고 남당이 분열하다
어재 방송분에선 백제를 아우르는 남당회의의 분열 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사씨 세력의 수장인 달솔 서충선은 진씨의 편을 들고 연씨 세력의 수장인 달솔 연도숙은 해씨 편을 들며 대등한 위치로 의견을 내놓고 충돌합니다. 국씨 세력의 수장 국나호는 딱히 지위가 묘사되지 않지만 달솔이 아닌 것으로 보아 눈치를 보는 수 밖에 없는 약한 부족인듯 합니다. 그는 남당에 나온 자들 중 말수가 가장 적은 편입니다.
부여구를 태자로 삼기로 한 비류왕은 부여구의 외가인 진씨 가문에 힘을 실어주고 중립적인 왕자 부여휘(이병욱)에게 태자의 권한인 위사군 통솔권을 맡깁니다. 진정의 장자이자 부여구의 사촌인 진승에게는 남당에 참여할 수 있는 달솔의 자격을 주지요. 위례궁주 부여준이 왕자와 대등한 대접을 받는 걸로 보이고 남당에도 참여하지만 '직위'는 없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백제의 관제가 정비된 건 부여준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사반왕의 왕위를 찬탈한 바로 그 인물, 고이왕 때입니다. 제1품이 좌평, 제 2품이 달솔, 제 3품이 은솔, 제 4품이 은솔, 제 5품이 한솔, 제 6품이 나솔이었습니다. 진정의 관직이 좌평인데 그 아들까지 달솔인 건 엄청난 특혜라 볼 수 있죠. 해소술의 사촌 오라버니이자 해씨 세력의 수장 해녕이 홀로 좌평인 것에 비하면 세력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해씨가 위협을 느낄 만한 이런 상황에서 부여준과 손을 잡은 건 어쩔 수가 없는 상황입니다. 백제 귀족의 의견이 반으로 나뉘고 모로성을 차지한 대장군 진고도(김형일)까지 진씨의 편이니 모로성의 군사들이 한성으로 진격하면 해소술과 해씨는 바로 패권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여구는 이렇게 자신의 지지세력이 다수 있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왕실에서 제거 당하고 첫번째 싸움에서 패합니다.
- 최근 발굴된 유적에서 무왕 부인이 백제좌평 사택적덕의 딸인걸로 밝혀졌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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