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삶이 절박한 시대의 '생계형 악역들'

Shain 2011. 6. 11.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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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화에 방영되는 MBC 드라마 '미스리플리'의 주인공은 자신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었던 과거 때문에 학력 위조를 하게 되는 비운의 여성입니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입양갔지만 양아버지의 도박빚을 갚기 위해 유흥가에서 일했고 간신히 한국으로 도망왔지만 한국에서 정식 사원으로 취업하지 못하면 취업비자가 발급되지 않아 일본으로 추방될 위기입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을 초래하는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각종 불행의 요소를 다 갖춘 그녀를 도무지 비난할 틈이 없습니다.

'반짝반짝 빛나는'의 주인공 황금란은 어릴 때부터 갖은 고생을 하고 자라 스물아홉이 될 때까지 가난한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살았습니다. 남들처럼 살아보고 싶어 사법고시생 남자친구를 사귀어 봤지만 가난한 집 출신인 그 남자는 합격하자 금란을 쓰레기 취급합니다. 사채업자에게 납치당하고 애인에게 차인 그녀의 정신력은 이미 상처투성이입니다. 그녀는 왜 자신이 세상의 피해자가 되어야 했는지 '신데렐라'가 되자 마자 깨닫습니다. 고생하고 자라 음울하기만 한 성격이 자기탓이랍니다.

MBC 드라마 '미스리플리'의 한장면


'내 마음이 들리니'의 봉마루는 남보다 예민하고 영리한 아이로 주변 사람들에 민감합니다. 무지렁이인 할머니와 남들이 바보라 부르는 아버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새엄마. 마루는 가족들을 사랑하지만 도무지 그들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남들이 놀리든 말든 내 가족이라고 감싸기엔 그런 취급을 받는 가족이 안타깝고 모른척 외면하기엔 속상해 미칠 것같습니다. 그런 말 조차 알아듣지 못하는 바보 아빠에게 화를 내기도 몇번 결국 마루는 기회가 오자 다른 가족의 일원이 됩니다.

최근 TV에서 가장 인기를 끄는 드라마 테마는 '거짓말'과 '출생의 비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소위 '생계형 악역'들이 등장해 거짓말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시청자들의 큰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각종 거짓말을 하고 타인을 괴롭히는 악역이 된 사람들의 이야기. 그냥 재미있는 드라마로 보기엔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그런 주제이지만 많은 공감을 얻고 있기도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당연히 비난받는 시대는 지났다

로맨틱 코미디가 해피엔딩이 아니면 어쩐지 기분이 마뜩찮고 정의로운 영웅이 등장한 드라마의 결말이 권선징악이 아니면 어쩐지 억울하고, 착하고 예쁜 주인공이 나온 드라마의 결말은 당연히 행복해야하고. 드라마가 대중을 상대하는 방식은 조금씩 변화되어오긴 했지만 대부분 비슷합니다. 드라마들이 질적으로 향상했다고 이야기하지만 TV 안에서 예술 영화(굳이 이렇게 구분을 해야하는지 모르겠지만)을 추구하는게 아니기에 재미있는 스토리텔링이면 대다수가 만족합니다.

과거에는 '악녀'가 TV에 등장하면 왜 이리 못됐냐며 길에서 그 악녀 역을 맡은 여성이 질타를 받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TV 속이든 실제 사회에서든 '정의'란 건 중요한 가치였고 그들을 응징하고 이겨내는 이야기를 당연시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야기 소재가 다양해짐에 따라 착한 이야기 만으론 만족하지 못하게 됩니다. '악당의 사연'을 구구절절 풀어놓는 이야기도 만들어지고, 악당이 몰락해도 비참하고 '멋지게' 몰락하는 이야기가 인기를 끕니다.

살인까지 저질렀지만 도망쳐야했던 극한 상황의 여주인공 드라마 '로열패밀리'


한마디로 '내 가치관에서는 이런 나쁜 짓이 당연하다'라는 입장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들이 시청자의 공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흑백논리로 '옳다, 그르다'를 모두 평가받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기에 이런 전개는 어느 부분 환영할만 합니다. 최근엔 그런 '악당'의 형태는 또 한층 발전해 '미스리플리'의 주인공 장미리의 상황에서도 '정의'를 추구해야하는가란 질문을 품게 만듭니다. '로열패밀리'의 김마리가 살인을 하고서도 정당한 심판을 받지 않고 도망쳐야했던 이유에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이는 '동안미녀'의 주인공 이소영이 처한 상황과도 연결됩니다. 취업도 잘 되지 않는 34세의 고졸 여성인 주인공이 먹고 살기 위해 여동생의 신분으로 위장하는 이야기를 보며 저런 식의 위장취업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원칙'을 추구하면 생존을 위협받게 됩니다. '미스리플리'의 장미리가 고졸로 취업시험을 계속 고집했다면 일본으로 강제 추방당할 것이고 '동안미녀'의 이소영이 취업을 하지 않는다면 백수가 됩니다.

취업을 위해 나이와 학력을 속인 드라마 '동안미녀'의 주인공


시청자들은 그들의 상황을 두고 자신의 경험과 가치관을 드라마 주인공에게 대입합니다. 일부는 아무리 그런 상황이라도 위장취업이나 학력위조같은 일은 절대 저질러서는 안된다고 주장할 것이고 주인공의 상황이 충분히 공감가는 사람들은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항변할 것입니다. 일부는 '사회의 피해자'랄 수 있는 그들 '거짓말'의 주인공들에게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할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이 못나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사회의 질서 보다는 개인에게 책임을 물어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겠죠.

드라마는 사회의 감정을 가장 잘 반영하는 매체기에 그들 주인공의 상황이 '현실적'으로 느껴질수록 실제 사회 역시 그 만큼의 불합리를 내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장미리가 고졸 여성으로 성추행을 당할 뻔한 장면이나 가짜 신분으로 취업해야하는 이소영의 고통을 어디선가 경험해보고 목격한 적이 있다는 그 느낌이 드라마의 '리얼리티'를 살려주고 있다는 점이죠. 마치 조선 시대 마당놀이가 속시원하게 사회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 완벽하진 않지만 유사한 체험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유흥가에서 일한다면

70년대에 발간된 윤정모의 소설 '고삐'의 주인공 정인은 생계가 막막해 유흥가에서 일합니다. 밑바닥을 구르는 여성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며 삶을 버티던 정인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가짜 여대생 흉내도 내고 가짜 여대생으로서 호스티스 취업도 해봅니다. 70년대의 팍팍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정인의 이야기는 사회의 이념과 맞물려 독자들의 감정을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최근 경향신문 보도를 보니 대학생들이 등록금 마련을 위해 유흥업소에서 일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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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에 아무리 귀천이 없다지만 등록금 마련을 위해 사람들이 기피하는 접대일을 하나는게 젊은, 아니 아직은 어리다고도 할 수 있는 대학생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사회는 그런 문제의 본질 보다는 사회적 규범을 강조한다거나 장학금을 받기 위해 차라리 이 악물고 공부하라는 식의 충고를 훨씬 더 많이 합니다. 그런 상황이 되어야하는 이유에 시선을 주기 보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말하는게 사회이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거나 최악의 선택을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개인적인 노력으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다수라는 걸 사회도 인정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드라마 주인공들이 '나는 이럴 수 밖에 없었다'라고 자기 변명을 하고 있는게 모습이 이 나라 국민들이 우리가 이렇게 절박하게 산다고 절규하는 모습으로 오버랩될 때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더욱 그런 드라마들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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