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와 문화

한예슬 사태, 20년전이나 지금이나 생방송 드라마

Shain 2011. 8. 18.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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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한예슬과 드라마 '스파이 명월' 제작이 중단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떠오른 건 '터질 게 터졌구나' 였습니다. 드라마 제작 현장이 위험하고 시간에 쫓기는 곳이란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습니다. 20년전에도 과로로 입원하는 여배우들이 많았고 드라마 제작 중 목숨을 잃은 스턴트맨이 있었고 주인공 여배우가 다치면 그 다음주 방송분이 방영되지 못하는 생방송 드라마 제작이 있었습니다. 1984년경 빙판길에 넘어져 뼈가 부러지는 등 전치 13주의 부상을 당한 배우 김혜자는 '전원일기'같은 고정 프로그램엔 다친걸로 설정하고 출연중이던 다른 드라마는 '사망'으로 처리해 하차해야 했습니다.

'스파이 명월'에 함께 출연하고 있던 에릭도 생방송 드라마의 피해자라 볼 수 있습니다. 촬영현장에서 연출진과 사인이 맞지 않아 스턴트맨이 몰고 오던 자동차를 온몸으로 막아내야 했던 에릭은 다음 장면을 전혀 촬영할 수 없는 부상을 입어 드라마가 방영 4회 만에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 드라마가 바로 2006년 방송되던 '늑대'입니다. 이 외에도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드라마 촬영 중이던 배우가 촬영중 졸도하고 쓰러지는 등의 사고는 다반사였습니다. 연예계의 고질병이라면 고질병이라고도 할 수 있었죠.

하긴 원래 처음 미국에서 드라마라는 것이 생겼을 땐 생방송으로 방송되는게 당연하긴 했습니다(당시엔 녹화, 녹음 등이 발달하지 않아서). TV 드라마도 생방송으로 방송되는 바람에 웃지 못할 실수들까지 그대로 방송을 타곤 했었죠. 덕분에 인기 TV나 라디오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휴가 한번 제대로 가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녹화 기술이 발달하고 난 요즘까지도 생방송이 당연하다면 그건 좀 뭔가 시대착오적이죠.

1984. 2. 9 신문기사 연예인들 부상, 과로로 드라마 촬영 중단


시청률 눈치를 보며 대본을 쓰다 보니 쪽대본이 나오고 그 쪽대본에 맞춰 배우들이 대사를 외우고 제작진이 소품을 준비하다 보니 아귀가 안맞습니다. 급한 일정으로 출연자와 제작진 모두가 무리를 하게 되고 그 사이에 사고가 빈번히 발생해서 때로는 사람이 죽고, 연예인 본인은 과한 스케줄 때문에 잠도 자지 못해 몸살을 앓기 일수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년동안 그런 현상을 바꾸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실 주연 배우들이 저 정도로 죽겠다고 엄살을 떨 때는 같이 제작하러 나온 스탭들의 고충은 말하기 힘들 정도일텐데 모두들 그 부분을 당연하게 여겨온 것이죠.

솔직히 평소 한예슬이란 배우의 연기력을 그닥 높게 평가해온 편은 아니라 '환상의 커플'을 재미있게 보았음에도 연기자로서는 그리 주목하지 않은게 사실입니다. 그녀의 직업이 연기자 또는 모델이다 보니 다른 평범한 연예인들 만큼은 노력한다 생각했고 내 취향은 아니라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겠지 싶던, 그냥 제 눈에는 흔하디 흔한 미녀 여배우 중 하나일 뿐입니다. 지금처럼 촬영하다 말고 돌연 미국행 비행기를 탈 만큼 철없는 사람인줄은 평소에는 전혀 모르던 성격이네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한 사람의 시청자로서 혹은 드라마 '스파이 명월'이나 한예슬이 출연한 CF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대중으로서 그녀가 불성실한 성격이냐 철이 없느냐는 별로 상관할 일이 아닙니다. 특정 연예인이 대중을 상대로 무개념한 발언이나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었다면 모를까 그녀의 성격 자체는 거론할 일도 아니고 신경쓸 부분도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연예인이 드라마 촬영 중에 '더러워서 못해먹겠다'며 제작 현장을 떠난 것도 전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봅니다.

정치인이나 경제인을 비롯한 공인들의 불성실함을 몹시 싫어하는 저이지만 연예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근로자이고 연예계는 배우들에게 근로 현장이고 노동 현장이다 보니 상황에 불만족스러운 점이나 도무지 감당이 안되는 현실이 생기면 한번쯤 객기를 부려서라도 그 부당함을 호소하는게 맞다고 봅니다. 그 방법이 논리적인 비난을 비롯한 정면 승부냐 혹은 한예슬처럼 촬영에 불참하는, 비논리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이냐 하는 차이일 뿐이겠지요. 지금 이 상황에서 지적될 것이 있다면 한예슬의 대응법이 서툴렀다는 것이지 그녀가 반발을 했어야 했느냐 아니냐는 본인이 판단할 문제라 봅니다.

연예계는 겉으로는 자유로워 보이는 꿈의 세계이지만 드라마나 영화의 제작 현장이 얼마나 열악하고 밥벌이가 안되는지 전부터 성토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배고파 죽었다는 한 작가의 이야기는 최소한의 수입도 보장받지 못하는 연예계 종사자의 현실이자 비참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열악한 그들의 상황에 동정을 보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나라의 다른 업종에 종사하는 근로자들은 그 보다도 열악하고 수입이 적은 상황에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연예계도 그렇지만 사회 전반에서 이 '한예슬 현상'은 반복적으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군가 하나 못 살겠다며 분노를 터트리기전에 알아서 사회의 고질적인 스트레스가 해결되는 법이 없습니다. 직장의 노동 환경이 고달프다 힘들다 비인간적이다 호소해봤자 누군가 스트레스로 자살하기 전까진 주목받는 법이 없고 청소년들의 과잉 경쟁이 문제가 되어도 그들 중 하나가 자살하기 전까진 아무도 관심가지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과격한 행동을 해도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는 점입니다.


누구 하나 죽어 나가야 간신히 관심을 받고 그나마 나아질 보장은 전혀 없다니 이 얼마나 황당한 상황입니까. 한예슬이 아무리 철없고 책임없는 행동을 했더라도 우리는 그나마 그런 현상이 없었으면 드라마 제작 환경이 얼마나 황당한지 입을 모아 비난하지 않았으리란 건 자명합니다. 아쉽게도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이 나타나기 전까진 아무도 그 문제점을 들으려 하지 않고 알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게 사회의 고질병이자 스트레스의 원인인데 그 부분을 한예슬이란 한 배우에게서 보게 될 줄은 몰랐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나마 주연급 여배우는 좀 나은 줄 알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여배우는 그나마 출연료라도 많으니 돈값을 해야하지 않느냐 라고 대응하는 분도 많겠지만 저는 비싼 월급을 줬다고 해서 사람을 혹사시키는게 당연하다고는 생각치 않습니다. 같은 논리로 돈받는게 쉬운줄 아냐며 최저 임금 보다 못한 월급을 주면서도 당당한 주인들에게도 우리는 별달리 할 말을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세상에 고생이나 최악의 근로 조건이 당연할 이유 따윈 아무곳에도 없습니다. 한예슬 만이 문제라며 성토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한예슬은 적으로 여기되 그런 촬영 조건을 당연시한다면 나아지는 건 없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연예계로서도 관행을 바꿀 기회를 얻은 셈인지도 모르지요.

예전부터 불만을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발전을 한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된 일인지 불만은 불만대로 끝나고 무조건 참고 견디라고 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만을 좀 더 나은 환경으로 바꾸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덜하는 편이란 이야기입니다. 어떻게든 촬영장에 복귀하고 손해배상을 피해보려 애쓰고 있을 한예슬이겠지만 다시 비인간적인 촬영장 이야기가 나오지 않도록 드라마 제작 책임자들도 노력해야하지 않을까요. 물론 전반적인 사회 분야의 각성이 있으면 더욱 금상첨화겠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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