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풍선/有口無言

고대 성추행 사건, 밀양 사건과 무엇이 달라졌나

Shain 2011. 9. 6. 0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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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여론의 추궁에도 침묵하던 고려대가 어제 9월 5일 드디어 '고대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 의대생 3인에 대한 출교 조치를 결정했고 세 사람은 의사 국가고시에도 응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피해자가 일련의 사태에 정신적 충격을 받아 우울증을 보이고 학교에 멀쩡하게 다닐 자신이 없다고 했던 것에 비하면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조치이지만 일단 바람직한 결정에 반갑다고 해야할 것 같네요. 물론 이렇게 당연하고 상식적인 조치를 피해자 측에서 고맙다고 해야하는 상황도 조금은 안타깝긴 합니다. 그래도 과거 일어난 여타 성범죄 관련 조치에 비해서는 상당히 신속한 조치였다는 점에 동감합니다.

처음 인터넷에서 고대 성추행 사건에 대해 듣고 피해자가 어떤 일을 당했는지 읽어나가는 동안 저는 2004년 12월경 발생한 밀양성폭행 사건을 떠올렸습니다. 당시 피해자가 10대였으니 7년이 지난 지금에선 고대 사건의 피해자와 얼추 비슷한 나이가 아닐까 싶습니다(피해자의 신상을 일부러 검색해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대충 비슷한 또래겠지요). 어린 나이에 그런 일을 겪어야 했던 한 소녀 때문에 그당시 얼마나 분노했는지 지금도 기억납니다. 당시 일부 네티즌들은 촛불집회를 여는 등 피해자에게 도움을 주고 한편 성범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기도 했습니다.

고려대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온 '출교조치' 담화문


2004년 12월 7일, 사람들은 밀양이라는 한 지역에서 발생한 엄청난 성범죄의 진상을 듣고 경악하기도 했지만 당시 피해자가 겪어야 했던 엄청난 2차 피해에 아직도 성범죄를 이런식으로 무식하게 수사하는 지 몰랐다며 분통을 터트렸습니다. 더우기 언론이 지역사람들이면 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피해자의 신원을 자세히 공개하는가 하면 수사 내용에 없던 '자매 성폭행' 기사를 싣기도 하는 등 가해자는 철저히 보호되면서 피해자는 이중 삼중으로 공격당하는 억울한 현상이 발생합니다.

결정적으로 문제가 터진 건 경찰이 피해자에게 폭언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이후입니다. 경찰은 수사 과정 중 피해자에게 '너희가 밀양 물 다 흐렸다'는 식의 피해자 비난 발언을 했다고 합니다(관련기사: 경찰 "너희가 밀양 물 다 흐려나', 한겨례). 여성 수사관이 수사를 하도록 해달라 요청해도 무시하는가 하면 가해자들 열명을 앞에 세워두고 대면하게 하는 등 상식을 벗어난 수사를 했다는 점 등이 속속들이 알려지게 됩니다. 성범죄를 이런식으로 수사하는데 어떻게 공정한 처벌이 가능하냐며 오히려 피해자를 더욱 괴롭히는 수사라는 지적과 반발이 터져나오기 시작합니다.

밀양 사건은 결국 성범죄 사건을 수사할 때 여성 수사관을 배치하거나 피해자의 신원 등을 비공개하는 원칙을 지켜야 한다는 점,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는 수사 공간이 필요하다는 등의 국민적 동의를 이끌게 됩니다(경찰은 당시 일부 개선을 약속했습니다). 또 언론이 양산하는 피해자에 대한 2차 피해, 즉 의도적으로 골라낸 자극적 선정적인 기사라던가 피해자의 신원을 노출하는 공격적 기사,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보도 등을 독자인 네티즌이 비난하고 나섭니다. 여전히 댓글에 의한 피해자 공격은 막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뒤로 네티즌이 직접 악플을 신고하고 게재 중단을 요청하기도 하는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전 아직도 이 부분은 포털 정책에 아쉬워하는 부분입니다. 현재 인터넷 기사들은 기사에 등장한 당사자들의 요청이 있을 때만 게재 중단이 가능한데 대부분의 성범죄 관련 기사에는 가해자를 비난하는 댓글도 많지만 피해자에 대한 공격도 만만치 않게 등록됩니다. 우연찮게 사고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이유 만으로 피해자들은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또다른 가해를 당하고 있는데 많은 언론이 이 부분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로 피해보상을 받는 건 아예 꿈도 꾸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 이후 '밀양성폭행' 사건의 피해자는 전학을 가고 학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가해자들이 아주 가벼운 처벌을 받고 학교생활을 했던 것에 비해 피해자는 다시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게 됩니다. 전학을 받아주지 않겠다는 학교들 때문에 고생하는가 하면 전학간 이후에도 '무식하게' 탄원서를 써달라고 찾아오는 가해자 학부모 때문에 그 사건의 피해자라는 사실이 주변에 소문나게 됩니다. 다들 자기 아들의 가벼운 처벌만 중요하다는 한 어머니의 이기심을 욕했지만 그들 가해자와 가족들은 지금도 아마 편히 살고 있을 것입니다. 2007년, 취재된 내용에 의하면 피해자는 가출했다는 소식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어떻게 사는 지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밀양성폭행 사건이 발생한지 7년, 고대 성추행 사건은 '밀양성폭행'과는 조금은 달라진 네티즌의 대응 방식에 놀랐습니다. 물론 여전히 가해자는 강자이고 피해자는 약자입니다(일부에서는 아직 수사중이기 때문에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명칭까지도 틀렸다고 주장하지만, 이들의 가해 피해관계는 아주 명확합니다. 뒤집어진다면 오히려 그게 더 미친 일이죠).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피해자를 욕하면서 피해자 책임론을 당연한 듯 주장하고 가해자의 어머니는 피해자를 찾아가고 법정에서도 고성을 지릅니다.

고대 성추행 사건 기사가 올라오면 늘 똑같은 논조로 해당 여학생을 비난하는 일련의 댓글들이 올라오곤 하는데(누군가 피해자를 아는 분이 있다면 그들을 단체로 조사해 명예훼손 소송을 했으면 싶을 정도로 수상한 댓글들이더군요. 혹은 아슬아슬하게 모욕죄를 면할 법한 공격적 내용입니다. 아이디는 여럿으로 보여도 말투는 대동소이합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피해자 과실론'은 말만 조금 바꿔 말하면 피해자에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말라는 말과도 같습니다. 6년을 알고 지낸 동료들을 믿고 여행이나 출장도 갈 수 없는 사회인이 어떻게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란 말인지 가치관의 차이라기엔 억지에 가까운 주장들이죠.

가해자 중 일부가 피해자에 대한 인신공격성, 명예훼손성 설문조사를 했음에도 전혀 마음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그 설문조사와 법정에서의 억지 주장으로 인해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가 퍼졌음에도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면 밀양성폭행에서 우리들이 발견한 성범죄 사건의 본질, 즉 약자와 강자의 논리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못된 심리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7년전에도 10대의 어린 여학생이 '나쁘다'고 소리 높여 말하던 가해자의 가족들, 지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가해자들이 아무리 출교 조치되었다고 한들 피해자의 고통은 이게 끝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가해자를 알게 모르게 옹호했다는 학과의 동료들과 교수들이 그녀를 배척할 지도 모르고 기나긴 소송으로 심신이 지쳐 원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가 될 지도 모릅니다. 심정적으로 얼마나 지쳐있을 지 알기에 앞으로 좋은 일만 일어났으면 하고 바라지만 분명 피해자의 앞길이 쉽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7년전과는 달리 많은 사람들이 용기있게 법적 조치를 취한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수 없을 지 몰라도 사회가 그때와는 조금쯤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으로도 피해자가 세상을 향해 용기를 내도 되지 않을까, 그렇게 격려해주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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