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한국 드라마 보기

7급공무원, 판타지와 달라도 너무 다른 김서원의 미인계

Shain 2013. 2. 22. 13:04
728x90
반응형
어릴 때는 스파이하면 면책특권을 가진 멋진 사기꾼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장난감 권총에 장난감 선그라스를 쓰고 '7급 공무원'의 한길로(주원)처럼 007를 꿈꾸는 어린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제법 첩보원의 역사를 읽어봤단 애들은 남자는 제임스 본드, 여자는 마타하리라며 역할 분담을 해주기도 했죠. 007이란 암호명의 제임스본드가 최첨단 무기를 이용해 본드걸과 작전을 수행하듯 여자 스파이도 똑같이 정보를 빼내려니 했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여자 스파이들은 남자와 달리 '미인계'를 담당하는 경우가 꽤 많더군요.

원조 여자 스파이로 알려진 마타하리가 진짜 스파이 역할을 했다 안했다 말은 많지만 어쨌든 그가 정보제공자에게 접근할 수 있었던 건 무용수로 활약한 경력과 뛰어난 미모 덕분이었습니다. 영화 '색, 계(2007)'의 실존 모델인 정핑루 역시 친일파인 딩모춘에게 접근하기 위해 자신의 미모를 이용했습니다. 요즘은 뭐 남, 녀 가리지 않고 미인계를 쓴다고는 합니다만 전통적으로 여자 스파이하면 '미인계'가 기본이었고 신선미(김민서)처럼 살인자와 맞서고 현장을 뛰는 역할은 주로 공도하(황찬성)같은 남성 요원에게 맡겨지곤 했습니다.

'타이밍 예술이다' 미인계도 사랑도 망쳐버린 김서원. 한길로는 어떻게 반응할까.

많은 영화들이 사랑에 빠진 스파이들의 고통을 묘사하곤 합니다. 정보를 캐야한다는 본연의 임무를 잊고 연인을 선택하면 국가의 위기가 찾아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영화 속 스파이들은 훈육관 김원석(안내상)의 말처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곤 합니다. 스파이들의 사랑과 연민은 '국가'라는 조직 앞에서 '작은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정보전쟁 중에 희생된 부모 때문에 산업스파이가 된 아나키스트 최우혁(엄태웅)의 말 즉 '인간이 만든 조직폭력배중에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집단이 국가'라는 대사는 큰 목적을 위해 자신들의 가족이 희생되었다는 뜻이었습니다.

국정원의 작전을 수행 중인 김서원(최강희)은 한주만(독고영재)의 아들인 한길로(주원)에게 접근하란 명령을 받습니다. 한길로의 집에 잠입해 금고를 뒤지려면 그의 연인인 것이 자연스러우니 인맥과 감정을 이용해 작전을 수행하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현대적인 의미의 '미인계'를 쓰라는 말인데 거짓말은 잘해도 워낙 정많고 원칙주의자인 김서원은 한길로와 진짜 사랑에 빠져 버립니다. 어제는 한길로를 내보내고 한주만의 금고를 털다 마침 집에 들어온 길로에게 딱 들켜버렸죠.사랑도 망하고 미인계도 망한 현실 속의 스파이입니다.

판타지 속 여자스파이들은 미인계를 잘만 쓰던데.. 현실감있는 김서원은 쫄딱 망했다.

옆 방송국에서 방영중인 '아이리스 2'를 보면 미인계나 암살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스파이들이 많습니다. 강렬한 암살신과 추격신으로 화제를 모은 '아이리스 2'의 김연화(임수향)는 북한측 온건파를 살해하기 위해 호텔 직원으로 위장했고 애정행각도 받아들였습니다. NSS 국장 강철환(이일우)의 비서이자 내연녀인 이수진(윤주희)는 레이(데이비드 맥기니스)의 연인이면서도 강철환과의 내연 관계를 이용해 NSS의 정보를 빼돌립니다. 국정원 직원 김서원을 NSS에 대려다 놓으면 아무리 거짓말을 잘 해도 미인계 따위는 할 수가 없겠죠.

달라도 너무 다른 김연화의 미인계와 김서원의 미인계. 하나는 진지한 스파이를 추구하는 드라마니까 미인계에 능숙한 요원을 선택했겠지만 허술하고 가짜같은 스파이 작전을 선택한 '7급공무원'에서는 김서원같은 스파이가 어울립니다. 뭐 워낙에 그런 어설픈 스파이작전이 이 드라마의 매력이기도 하구요. 극중 대사처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것이나 '국가를 위해서'라는게 말이 쉽지 그냥 거짓말 차원에서 끝날 일은 아닙니다. 김원석은 '세상에서 가족을 지키는 일 만큼 멋있는게 어딨냐'며 한길로를 격려했지만 실상 스파이작전 앞에서 '가족'은 '작은 것'에 불과할 뿐이죠.

'큰 고래' 한마리 잡겠다는 오광재 국장과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김원석.

국장 오광재(최종환)는 과거에도 미래(김수현)와 JJ(임윤호)의 가족을 포섭해 불법 무기거래상을 잡는데 이용하고 버렸습니다. 그 가족의 자녀들인 미래와 최우혁, JJ가 국정원에 복수하겠다며 다시 나선 것입니다. 오광재는 이번에도 공도하를 이용해 산업스파이 범죄자를 체포했다가 풀어줍니다. 뭔가 큰 건수를 잡겠다는 목적으로 범죄자를 이용해 작전을 꾸미는 것 같습니다. 오광재는 '아이리스'의 경우처럼 한국정보기관의 국장이 국제 범죄단체인 아이리스의 조직원이었다는 대반전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자는 마인드로 작전을 꾸미는 타입임에는 틀임없습니다.

김원석은 자신에게 속고 있는 한길로와 김서원 사이를 오가며 작전을 위해 둘의 마음을 이용하고 장영순(장영남)은 두 사람이 진짜 사랑에라도 빠지면 어쩌냐며 걱정하지만 오광재같은 거물급 기획자들에겐 두 사람 따위의 마음 보다 한주만 가족의 안전 보다 산업스파이를 잡는다는 명분이 더욱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만약 국가적인 작전에 희생되는 가족이 남이 아니라 내 가족이라면 상처받아야할 사람이 생판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내 연인이라면 쉽게 속이고 미인계를 쓸 수 있을까요. 작전 지시를 내리는 오광재와는 달리당사자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김서원 키스신 찍은지 얼마나 됐다고 또 들켰냐..

입바른 소리 잘 하는 오막내(김미경) 여사도 남편 김판석(이한위)에게 그러잖아요. 이장 김판석이 추진하려는 일을 10여명의 동네 사람이 반대하자 김판석은 '야당 그까이꺼'하며 무시하려 합니다. 오막내 여사는 '동네일을 숫자로 헌댜 인정으로 허지'라며 한마디 합니다. '사바사바'가 세상 사는 이치고 일의 원리라 생각하는 김판석과 남편하는 일 잘 따라주다가도 한마디 거드는 오막내 여사가 꼬집는 세상사는 이치가 그렇죠. 미인계고 뭐고 '큰 것'을 위해 가족과 사랑을 포기하라면 쉽게 '네'라고 대답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임무를 위해 가족도 사랑도 포기한다는 판타지 - 스파이 영화의 기본 컨셉은 쿨하고 깔끔합니다만 그 속에서 자행되는 개인에 대한 폭력은 정말 안타까운 경우가 많습니다. 스파이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희생을 자연스럽게 생각해왔죠.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의 안티 국정원인 미래, JJ, 최우혁이 국제적인 산업스파이로 활동하며 한주만을 미끼로 국정원 직원들을 납치하려고 마음먹은 근본적인 이유는 '가족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주만이 한길로를 멀리 떼버리려고 하고 한길로가 아버지 곁을 안 떠나려고 하고 김서원이 말도 안되는 아버지의 '사바사바'를 들어주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뭔가 말도 안되는 일만 계속 하고 있는 국정원의 신입 직원들.

우리 나라에서 '국정원'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한다는 판타지는 깨어진지 오래입니다. 진지한 스파이 드라마가 어딘지 모르게 코믹하게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일테구요. 어떤 경우에는 굳이 그런 일을 하기 위해서 미인계까지 써야하는 건가 싶은 그런 일도 있습니다. 팜므파탈 여자 스파이의 대명사인 마타하리의 진짜 인생은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배고픔과 가난 때문에 괴로웠다고 합니다. 액션과 화려한 생활을 넘나드는 멋진 스파이 판타지는 궁상스럽게 쪼그리고 앉아 남자친구 아버지 금고를 터는 일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도 공도하와 한길로 둘 사이를 오가는 귀여운 김서원을 보고 팜므파탈을 연상하지도 않을테구요. 그냥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취업한 그녀의 팍팍한 인생이 안됐고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남자를 속여야하는 처지가 딱하고 그러면서도 목숨까지 위험하다니 제대로 걸렸구나 싶고. 랑도 미인계도 망해버린 김서원이 이번에는 어떻게 한길로와 다시 가까워질 수 있을지 궁금하고 그렇다는 겁니다. 한길로의 말대로 정말 '타이밍 예술'이었거든요. 기존 '사랑에 빠진 스파이'들과는 다른, 예측불허의 순간이 이어지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728x90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