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Inside/오락가락

윤창중 막장드라마와 우리 나라 언론의 직무유기

Shain 2013. 5. 13. 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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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 보면 어쩌면 저런 설정을 생각해낼 수 있나 싶어 기가 막힐 때가 한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삼각관계에 불륜로 점철된 드라마가 정신건강에 안 좋다며 투털거리다가도 막상 이런 저런 사회 뉴스를 보면 현실이 드라마 보다 더 막장이구나 싶어지더군요. 드라마는 그래도 짜고치는 고스톱이고 어짜피 가상의 이야기라는 걸 알지만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어이없는 사건들은 쉽게 해결되지도 않고 뾰족한 해피엔딩도 없습니다. 특히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힌 정치권의 막장드라마는 국민들의 비난이 빗발쳐도 딱히 바뀌는 일이 없죠.

저는 평소 TV와 언론 쪽에 관심이 많습니다. 우리 나라같은 복잡한 대립 상황에서는 TV와 언론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하지만 이번 윤창중 사건에 대해 공중파 TV에서 정확한 정보나 취재를 하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에 대한 윤창중의 기자회견은 많은 부분 다른 사람들의 증언과 달랐습니다. 진위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라도 언론의 추가 취재와 정보가 필요했는데 언론은 이번에도 '엉덩이'와 '알몸'같은 선정적인 키워드로 뉴스를 도배했을 뿐입니다.

하루 만에 드러난 윤창중의 거짓말

물론 YTN이 속보로 보도한 '"창중 전 대변인 '엉덩이 만졌다', '알몸 상태' 시인"같은 뉴스야 다소 자극적이긴 해도 이남기 청와대 홍보수석과 윤창중 두 사람 중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였고 그뉴스로 인해 윤창중의 기자회견은 신뢰를 잃었습니다. 그런 그가 국민들 앞에서 단순한 '문화차이'라며 결백을 주장하는, 대담한 시나리오를 짤 수 있었던 것은 한국에 현지 정보가 많은 부분 차단되어 있던 덕분입니다. 인터넷으로 전달되는 여러 증언들을 루머로 주장할 수 있었던 거죠.

그럼 이번 윤창중 사건으로 우리 나라 언론은 어떤 점을 놓치고 있었을까요. 관심있게 지켜보는 국민들이 많은 이때 간단하게나마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되짚어볼까 합니다.



첫번째, 윤창중 성폭행인가 성추행인가?

처음 Missy USA 사이트에 대변인 윤창중 관련 의혹이 올라온 것은 5월 9일입니다. 지금은 삭제되었지만 도와달라며 글을 올렸던 제보자는 분명히 이번 사건을 '성폭행'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서는 이 사건을 '성추행' 사건으로 보도했고 많은 네티즌들이 그 부분을 지적했습니다. 미국 현지에서는 성폭행이라는데 왜 사건을 축소해서 '성추행'이라 보도하느냐 하는 점이 문제였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성폭행'은 '강간(rape)'이란 용어를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폭행'이란 용어의 영어 표현인 'sexual assault'는 상당히 폭넓은 뜻으로 '강간' 뿐만 아니라 동의하지 않은 신체 접촉, 강간 미수도 성폭행의 범주에 넣습니다. 말하자면 'sexual assault'라고 표현했을 경우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였는지는 자세히 봐야 안다는 뜻입니다.

분명히 처음에는 '성폭행'이라고 제보했는데 왜 '성추행'이 된 것일까.

우리 나라에서는 성폭행이란 단어를 'rape'라는 뜻으로 협소하게 쓰지만 영어로는 신체접촉부터 중한 성범죄까지 포함될 수 있는 단어로 윤창중의 행동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늠하기 힘듭니다. 외교사절이 성추행을 했든 폭행을 했든 엄청난 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한국상황에서 '성추행'이란 표현은 어쩐지 좀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입장에 따라서는 '인턴'을 굳이 '가이드'라고 표현한 윤창중의 기자회견 내용처럼 사건을 축소하려한다는 느낌도 받습니다. 현지에 있는 박승희 기자의 뉴스에 따르면 현지 경찰은 이번 사건을 sex abuse-misd 즉 가벼운 성추행으로 분류하고 있다고 합니다.

덧붙여 '성폭행'의 정확한 의미를 캐치한 언론이 없었기 때문에 마치 처음 Missy USA에 글을 올린 사람이 '성추행'을 확대, 과장해서 제보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처음 이 문제가 불거졌을 때 한국적인 의미의 '성폭행'인지 약간 다른 뜻으로 쓰인 말인지 정확히 알려줄 필요가 있었죠. 물론 '성추행'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이 상황이 막장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두번째, 78명의 수행기자들은 정말 몰랐나?

지금은 삭제되고 없는 기사입니다만(캡처된 이미지 참조) 윤창중이 한국으로 귀국했다는 사실을 처음 보도한 것은 중앙일보 신용호 기자입니다(2013. 5. 10, 7:47에 올라온 기사). 구글 캐시 검색에서도 사라졌으나 지금도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해당 기사를 복사해서 올린 포스팅을 종종 찾아볼 수 있습니다. 신용호 기자는 그 기사에서 현지 교포들 사이에서 나돌고 있는 성추행설을 기사화했으며 방문 일정중 돌연히 귀국한 윤창중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윤 대변인의 체포설이 나오는 시점은 박 대통령의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 4시간 전'이라며 자세한 내용을 전한 이 기사는 상세하지는 않지만 의외로 사건 내용을 꽤 정확히 보도한 뉴스였습니다. 그리고 기사 말미에서 읽을 수 있듯 윤대변인의 거취에 대해 대사관에 함구령을 내렸다는 내용도 적혀 있죠. 중앙일보 측은 이 기사가 퍼져나가기전 꽤 빨리 삭제했다고 합니다.

제일 먼저 윤창중 스캔들을 보도했으나 삭제된 기사.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에 동행한 기자들은 무려 78명으로 기존 대통령 방미 때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윤대변인이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그들은 '속보'나 '단독보도'를 자제(?)하고 대통령과 함께 조용히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반적으로 수행기자들은 공식적으로 잠자리와 식사를 대접받고 외교사절을 수행하기에 현지일을 잘 모를 걸이라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어쨌든 그들의 역할이 기자이다 보니 기자로서 무책임했다는 비난은 피할 수 없게 된듯합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5월 7일입니다. 청와대 대변인이 공식석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취재를 시도할 수 있었을텐데 지금에서야 '윤창중 목격담'이 드러날 뿐 현지에서는 엠바고 요청이라도 받은 것인지 78명 모두가 입을 다물었습니다. 국내 언론사 쪽에서 어찌된 것이냐는 전화연락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윤창중은 5월 11일 기자회견 자리에서 '속옷차림이었냐 알몸이었냐'는 주진우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빠르게 현장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네티즌은 이를 두고 기자회견에서 '거짓말'을 하다 보니 상황에 대한 정확한 질문에 뜨끔했던 것 아니냐고 분석합니다. 국내에서도 이렇게 정확한 정보를 알아내는데 현장까지 따라간 기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요?



세번째, 이번 대통령의 방미 문제가 없었나?

솔직히 말해서 이번 박근혜 대통령의 성과가 무엇인지 그리고 문제점은 무엇인지 아직까지 잘 파악이 안됩니다. 정부관계자가 아닌 평범한 국민들은 국가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언론으로부터 얻습니다. 당연히 국민이라면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투입된 이번 방미의 성과를 보고받고 평가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윤창중 사건에 묻혀 각종 무기를 도입하고 통상 임금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은 서서히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윤창중에 묻힌 박근혜 대통령의 방미. 과연 무슨 일을 하고 왔는가.

마찬가지로 국민들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국정원의 대선 지원 논란이나 각종 사회적 현안들이 윤창중 사건 하나로 모두 뒷전이 되고 말았습니다. 윤창중 스캔들이 무슨 일개 연예인의 성폭행 논란도 아니고도 국가적 사안이라 중요한 것인데 정작 중요한 국가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제껴버리면 어쩌자는 것인지 기자들 모두가 미국에서 건너오는 사소한 정보에 목을 맬 것이 아니라 본연의 책임인 방미 성과를 분석, 보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네번째,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은 이번 사건이 '새누리당'의 성윤리가 만천하에 드러난 사건이라 비난합니다. 무슨 연예인 몰래카메라도 아니고 '성접대 동영상'의 주인공이 된 김학의 차관부터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윤창중 스캔들까지 대통령 취임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경악할만한 사건이 연일 쏟아집니다. 겉으로 드러난 그런 문제점도 문제점이지만 더욱 망신스러운 것은 이번 사건에 대한 그들의 태도와 일부 국민들의 행동입니다.

피해여성은 나이어린 무급 인턴으로 대사관에 정식 채용된 능력있는 인력이긴 하나 책임있는 지위나 직책을 가진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 인턴을 가이드 운운하며 하찮게 여기거나 무능한 여성으로 언급하는 것도 부끄러웠고 피해 인턴에 대한 민망한 좌빨 논란이나 신상털기는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입니다. 미인 인턴을 채용한 대사관에도 책임있다는 말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하는 말일까요.

AP 연합이 보도한 윤창준 스캔들. 국제적인 망신을 당한 근본 이유는 무엇인가.

무엇보다 '성추행'을 가볍게 보며 해당 여성을 조롱하고 이번 사건을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축소하는 행동이 오히려 우리 나라를 더욱 창피하게 만든다는 점을 알아야합니다.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 해당 사건을 경미하게 평가하거나 해당 여성을 문제삼고 쉬쉬하며 덮으려는 나라를 다른 나라에서 어떻게 생각할까요? 개인적으로는 국제적 망신을 자초한 윤창중을 어서 빨리 미국으로 보내라는 여론이 즉각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적잖이 실망했습니다.

연예인도 아닌 '공직자'. '공인'이 국민을 이렇게 만만하게 봐도 되는 것일까요? 윤창중이 무죄를 주장하며 막장 드라마 시나리오를 짜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사건이 있을 때 마다 초점을 흐리는 언론과 그를 덮어주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나라가 공직자들의 도덕성, 윤리와 성폭력에 얼마나 둔감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라 더욱 씁쓸하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적어도 언론이라면 근본 원인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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