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중 하나가 결혼을 하게 되서 간만에 그 집에 놀러갔더니 친구 어머니가 저를 붙잡고 한소리하시더군요. 친구가 어릴 때는 아빠같은 남자와는 결혼하기 싫다고 투털대더니 결혼하겠다며 데려온 남자가 딱 아버지와 똑같은 타입이더랍니다. 고전적인(?) 시어머니 덕에 남편과 자주 티격태격하던 친구 어머니는 당신 팔자를 친구가 그대로 닮으면 어쩌나 푸념 아닌 푸념을 했습니다(진지한게 아니라 농담처럼 그러시더군요). 저 역시 친구에게 아내 보다 어머니가 우선인 남성은 싫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 때문에 똑같은 사람을 골랐다는 말이 의아하긴 하더라구요.
알게 모르게 딸들이 아버지와 비슷한 남자를 고른다는 말은 맞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들이 어머니와 비슷한 여성을 은연중에 선택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싫다 싫다 하면서도 오랫동안 한집에서 같이 살면 취향이나 습관이 비슷해지기 마련이고 부모와 외모나 성향이 비슷한 이성에게 끌리게 된다는 이야기죠. 신기하게도 이런 성향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자식들을 실망시켰을 때도 나타나곤 하는데 부모의 불륜으로 이혼하게 된 가정의 자녀들이 부모가 밉다고 하면서도 부모닮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습니다.
물론 부모같은 사람과는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다는 꿋꿋한(?) 의지로 정반대의 이성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분명한 건 그렇게 부모와의 갈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런 상처를 감내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상처를 준 부모가 애증의 대상이란 점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생 동안 부모와 갈등하며 그런 상처를 치료하기도 하고 딱지가 앉은채로 괜찮은 척 살아가기도 합니다. 가끔은 나는 절대로 그렇게 안 살거라고 했는데 부모와 똑같은 짓을 했다며 씁쓸하게 웃기도 하고 아등바등 살다가 우연찮게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도 합니다.
미주(홍수현)가 기를 쓰고 독하게 재민을 포기하는 마음 일부분에는 무책임한 아버지 송호섭(강석우) 덕분에 평생을 혼자 살게 된 어머니 홍순애(차화연)에 대한 감정도 일부 섞여 있을 것 입니다. 재민은 여러 장점이 많은 남자지만 미주에게 가족에 대해서 쉽게 털어놓지 않고 직장이 불안정한 남자이기도 합니다. 아웅다웅하는 부모의 삶을 보면서 삶의 의지가 되어주지 않는 남자는 선택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었고 그때문에 끌리는 마음도 포기하고 이별을 선언했던 것이죠.
'사랑해서 남주나'의 아버지 정현수(박근형)는 전직 판사 출신으로 아내와 사별 후 재민(이상엽)과 단 둘이 삽니다. 큰딸 유진(유호정)은 의사 남편 강성훈(김성수)과 결혼해서 살고 있고 둘째딸 유라(한고은)는 아내가 죽자 독립해버렸습니다. 유라는 재민이 밖에서 낳아온 동생이란 점 때문에 아버지와 의절하다시피했고 하나뿐인 남동생도 원수보듯 대합니다. 정현수는 유라가 좋아한다는 잡채를 특별히 반찬가게에 부탁해서 만들어다 주면서도 유라가 싫은 소리할까봐 남몰래 다녀갑니다. 그러다가 떡하니 유라의 불륜 상대와 마주치게 되었죠.
어릴 때부터 믿고 따르던 아빠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동생을 낳았다면 좋아할 딸은 아무도 없을 것 입니다.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든든한 울타리가 무너지는 느낌에 아빠에 대한 배신감으로 아빠를 미워하게 되죠. 부모의 불륜으로 고민해본 자식들이라면 아버지를 싫어하는 유라의 심리를 조금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극중 미주네 집처럼 이혼을 하게 되면 차라리 아버지와의 인연을 깔끔하게 '남'이라며 포기할 수 있는데 정현수처럼 같이 살면 오히려 싫은 마음이 더욱 커지기만 합니다. 이런 원망은 꽤 오랫동안 자식들을 괴롭힙니다.
그런데 부모가 저지른 잘못을 그대로 반복하는 자식들이 있다는 것도 희한한 일 입니다. 아버지의 폭력으로 가정이 불행해졌다는 아들이 똑같이 아내를 폭행하고 도박으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를 보면서도 도박에 빠져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극중의 유라가 아버지를 싫어하는 이유는 아버지가 엄마와 자식들을 배신하고 바람을 피웠다는 것인데 자신은 오히려 유부남 장윤철(조연우)의 불륜 상대가 되어 데이트를 즐기고 있습니다. 극장에서 남들이 볼까봐 손도 제대로 못 잡는 그들의 애정행각은 어딘지 모르게 아슬아슬하죠.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면서도 가정있는 남자의 불륜 상대가 되는 심리는 무엇일까. 가끔씩 유라는 그런 자신의 행동에 모종의 자괴감을 느끼는 듯하지만 그러면서도 윤철과의 관계를 포기할 생각은 없어보이는 듯합니다. 미혼의 여성이 유부남을 좋아하는 심리 중 하나는 유부남 특유의 안정감이라고 하던가요. 유라는 가정을 꾸리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윤철을 보면서 어릴 적 좋아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배신감을 느낀 만큼 상대적으로 유부남 윤철에게 더 끌리는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죠. 어쩌면 이런 마음은 부모닮은 배우자를 선택하는 마음과 비슷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유라의 불륜을 보게 된 정현수의 고통입니다. 바람피운 아버지는 재민과 유라 둘 모두에게 죄인이고 둘 다 불쌍하단 생각에 뭐든지 해주고 싶었는데 결혼도 하지 않은 유라가 유부남과 바람이 났습니다. 전화통화중이던 윤철이 유부남이라는 걸 알면서도 어떤 사이냐고 묻지 못하는 정현수에게 유라는 반대로 이렇게 묻습니다. '아버지는 엄마두고 다른 여자 만났을 때 우리가 받을 고통 걱정하셨냐. 재민이가 생겼을 때 우리가 받을 충격 생각했냐 '고 묻는 유라에게 어떻게 불륜은 잘못이라고 야단을 칠 수 있을까요.
물론 부모의 문제는 부모의 것이고 자식은 자식이라고 쉽게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라가 성장기의 충격을 제대로 넘기지 못한 것도 어떻게 보면 정현수의 책임입니다. 부모의 잘못 앞에서 의연한 자식들도 있지만 그때를 놓치고 방황하고 그 모습 그대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이 모두 서른이 넘은 마당에 대화도 하기 쉽지 않은 작은 딸에게 용서를 구할 수도 없고 그렇게 살지말라고 타이를 수도 없는 처지가 참 안타깝게 보이더군요. 화장실에서 울먹이는 아버지의 고통을 달래줄 사람은 많지 않겠지요.
아무에게도 상의할 곳 없는 정현수가 누굴 찾아갈 수 있을까요. 딸 유라와의 갈등은 정현수와 반찬가게 아줌마 차순애의 로맨스를 이끌어갈 중요한 부분이 될 거 같단 생각이 들더군요. 반찬가게에서 차순애의 딸 미주를 본 적이 있으니 정현수가 순애에게 딸에 대한 상담을 자연스럽게 시도할 수도 있을 지도 모릅니다. 깐깐하고 빈틈없는 정현수에게 이런 식으로 사랑이 시작되나 봅니다(그건 그렇고 대체 재민이의 엄마는 누구일까요. 은하경(신다은)의 집에서 일하는 신수정(최수린)이란 생각이 자꾸 드는데 설마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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