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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긴 글이 될 것같다는 예감에 어떤 이야기를 먼저 꺼낼지 고민되는군요. 드라마나 영화는 인상적인 연출이 중요하지만 글이나 만화는 긴 호흡의 나레티브와 서사를 중요시하는 경우가 많아 '창작'이란 공통점은 있어도 전개 방식이나 창작에 대한 인식은 다른 경우가 있습니다. 작가와 블로거의 차이랄 수도 있는데 블로거들도 알게 모르게 '표절' 혹은 '베끼기'를 자주 당합니다. 간단하게는 남의 포스팅을 마치 자기 글인양 게시하는 경우를 당하고 심한 경우 기자들이 블로거의 주장을 자신의 생각인양 무단으로 가져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블로거는 대부분 베꼈다는 주장을 하기 힘듭니다. 문장을 그대로 카피했으면 그나마 증거가 있지만,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기라는 이유로 기승전결까지 똑같은 주장을 베꼈다는 걸 증명할 수 없거니와 아이디어의 참신함은 인정받아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다른 맥락으로 글을 쓰는 걸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블로그' 자체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매체다 보니 마구 퍼져나가 건 막을 수 없는 셈입니다. 인터넷 유머가 출처도 없이 퍼져나가는 과정도 비슷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박지은 작가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 리뷰가 거의 똑같은 구조로 기사화된 것을 보면서며 그냥 어이없다는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지금은 지워진 것 같군요). 포털에 글을 올리다보면 부분 부분 카피 당하는건 여러번 겪는 일입니다. 특히 정보를 정리한 내용은 복사본이 여기저기 굴러다닙니다. 당시 '넝쿨째 굴러온 당신' 포스팅 조회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화제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인터넷 뉴스와 공감을 중요시하는 블로그 포스팅은 소설이나 음악처럼 저작권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 강경옥 작가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표절 의혹을 제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소송으로 강경옥 작가가 불리하다고 했습니다. 표절 영역에는 한 컨텐츠의 일부를 그대로 카피하는 부분 표절이 있는가 하면 전체적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인용, 도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디어 도용이나 원작 변형도 크게는 표절에 해당합니다. 분명한 건 이런 표절의 최종 판단은 대부분 법원에서 결정난다는 것이며 어제 입장 표명을 한 박지은 작가의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강경옥 작가는 '별빛속에(1987)' 등으로 유명한 SF 순정만화의 일인자이고 박지은 작가는 그동안 '내조의 여왕(2009)'이나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로 잘 알려진 통속극 작가입니다. 두 사람의 첨예한 대립은 법적 판단 외에도 드라마 작가과 만화작가의 대립이란 면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강경옥 작가가 처음 표절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와 관련 기사에 심한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방송사의 입장표명 때문에 강경옥 작가가 만화작가라서 무시한다는 말도 많았습니다.
두 작가를 옹호하는 입장 차이는 크게 보면 드라마 작가와 SF 작가의 차이가 보입니다. 특히 통속극 작가들의 표절 소송을 보면 한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는 부분 표절은 문제시하는 반면 전체적인 스토리의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은 완전히 같지 않은 이상 개의치 않는 분위기가 있습니다(신데렐라나 가족 판타지가 재생산되는 걸 별로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죠). 반면 SF 장르는 소재의 독창성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 '에일리언(1979)'이 '진홍색의 불협화음(Discord in Scarlet, 1939)'와 한두가지 설정이 유사하단 이유로 판권을 샀던 것처럼 말입니다.
드라마 작가 - 소재와 아이디어는 표절 대상이 아니다
예전에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2010)'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황미나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황미나 작가 주장은 '전체 표절'이냐 '부분 표절'이냐가 아니라 '아이디어 도용'이었습니다. 황미나 작가 역시 데뷔 연차가 오래된 만화작가로 굵직한 히트작이 많은 작가였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가든'이 정말 표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 보다 핵심적인 주장은 만화가가 아이디어 제공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이었죠.
드라마 작가들에겐 어떤 경우가 표절일까. 많은 사람들이 '설희' 논란이 불거지자 '설희'는 그럼 '진용(1988)'의 표절이 아니냔 말까지 꺼냈는데 드라마판에선 가족 드라마, 신데렐라, 복수극이 히트치면 그 소재와 포맷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TV 컨텐츠의 특징상 소재의 소재가 같냐 아니냐 보다 중요한게 같은 스토리와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하는 것입니다. 한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지 않은 이상 표절 소송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죠.
김수현 작가의 표절 소송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김수현 작가는 '사랑이 뭐길래(1992)'는 가풍이 전혀 다른 두 가족 즉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과 여성 중심의 가족이 결혼으로 맺어져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포맷은 MBC '장미와 콩나물(1999)'에서도 유사하게 반영되었지만 김수현 작가는 그 드라마를 표절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우와 솜사탕(2001)'이란 드라마에는 '사랑이 뭐길래'와 내용만 비슷한게 아니라 대사가 같은 장면이 세 차례 이상 반복된다며 표절 소송을 벌였습니다.
위 소송에서도 알 수 있듯 드라마 작가들의 표절 기준은 '소재'나 '아이디어'가 아닌 같은 텍스트, 같은 장면의 연출입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이 표절 소송에서 진 것도 도입 부분에 임충 작가의 '전설의 고향'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홍자매 작가들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오마쥬'였다고 해명했지만 임충 작가에게 허락받지 않아 소송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자격정지 1년이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여우와 솜사탕' 작가는 아예 제명되었죠).
사실 문화관광부에서 밝힌 드라마, 영화의 표절 기준도 작가들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강경옥 작가도 아이디어 도용과 소재 차용이라는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디어 도용'을 표절 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위기는 만화가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소위 같은 소재(강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클리셰')를 동시에 여덟가지나 같이 쓰고 있어도 아이디어 도용 문제로 표절 소송에서 이기기는 꽤 힘들다는 것입니다.
SF 만화 - 참신하고 독특한 설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매트릭스(1999)'의 흥행으로 '이퀄리브리엄(2002)'이 많이 다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액션이나 빅브라더 월드라는 설정으로 아류작이란 평까지 들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SF 계열에선 예전에 썼던 소재를 썼든 새로운 설정을 창작해 내든 독창성이 중요합니다. 강경옥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일기를 토대로 400년간 세상을 살아온 이야기를 최초로 창조해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해군 때 나타난 UFO를 토대로 만든 '기찰비록(2010)'이 있지만 그 드라마에 400년 간 살아온 외계인 혹은 인간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강경옥 작가는 예전부터 SF 만화를 그렸습니다. '별빛속에'가 지구에서 살아가던 한 소녀가 외계 행성의 공주였음이 밝혀지면서 슬픈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내용. 외계에서 지구로 버려졌기 때문에 입양 후 한참이 지날 때까지 중력 차이를 적응하지 못해 연습했다는 설정이나 지구에서 초능력, 고향별까지의 거리 때문에 자주 올 수 없다는 내용 등 SF 상식으로는 뻔한지 몰라도 상상력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독특한 이야기는 강경옥 작품의 핵심이었습니다.
어렵고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쉬운 SF 설정을 배경으로 독자를 울리고야 마는 인간에 대한 시선은 강경옥 작가 특유의 매력이죠. 그래서 '설희'에서 배경으로 선택한 광해군 일기와 400여년이 걸린 환생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혈액, 주인공 설희가 인간에 대해 가진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시니컬한 태도는 이 만화의 특징이고 독창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소재 하나하나가 묶여서 이 만화의 SF적인 색깔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위에서 언급한 영화 '에일리언'은 소설 '진홍빛의 불협화음'은 우주선 안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괴생명체와 인간의 몸에 알을 낳는 설정이 비슷합니다. 영화, 소설을 모두 접해본 사람들은 두가지 설정만 빼면 두 이야기는 굉장히 다르다고 평가합니다만 어쨌든 영화사 쪽에서 판권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특한 공포영화인 '에일리언' 자체가 여러 작품의 표절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진홍빛의 불협화음'이 '에일리언'의 원작인줄 아는 분도 많더군요.
그동안 아이디어와 소재가 혹은 장면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찜찜한 드라마들이 많았습니다. 법적으로는 표절에서 안전하고 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그들의 변명이 되겠지만 SF 장르와 소재가 8가지(강경옥 작가가 짚어낸 것만 8가지) 겹친다는 것은 다른 작품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강경옥 작가의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도 그 부분이구요. 이 상황에선 2차 저작물 제작은 물건너 가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고의성이 없다고 쳐도 그 부분은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요.
표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만화작가를 향한 무례
박지은 작가는 사회 풍자에 능숙한 작가입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시집살이란 진부한 주제를 유쾌하게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통속극을 이렇게 재미있고 신선하게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강경옥 작가는 SF 속성을 인간의 사랑과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로 이용했고, 그 쪽 분야에서 한획을 그은 만화가입니다. 법적으로 문제없다, 아이디어를 도용당했다는 양쪽의 입장차이는 충분히 이해하나 드라마 제작사가 만화작가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논란 초반부터 제가 분노했던 점은 강경옥 작가의 블로그에 감행되고 있는 각종 테러입니다. 작가에게 '오징어', '관종', '설친다' 같은 표현을 쓰며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이 논란에 더욱 불을 붙이고 있죠.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자 만화작가의 관계에서 또 아이디어 차용을 인정하지 않는 관련법 앞에서 만화가는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화작가들이 표절의혹을 제기할 때 마다 '말도 안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방송사, 기업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 같네요.
저같은 일개 블로거도 카피에 화가 나고 가끔씩 짜증이 납니다. 작은 부분이든 아이디어든 가끔은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도(시간 상으로 거의 동시에 글을 발표했더군요)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방송사나 팬들이 만화작가를 대등한 의혹 제기 대상으로 존중하기는 커녕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한다는데 큰 분노를 느낍니다. 따지고 보면 이 논란의 핵심은 표절 판정 보다 존중이죠. 강경옥 작가와 상관없는 제 블로그에 욕설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어떤 말을 하고 다닐지 뻔한 일입니다.
소설에 외계인을 등장시키는 건 한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큼 참신한 소재였습니다. 요즘은 어떤 소재를 써도 '어디서 본듯한 것들'이 더 많습니다. 외계인은 흔한 클리셰가 되버렸죠. 그렇다고 너무 익숙하지 않은 소재를 쓰면 대중성이 떨어져 독창성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별에서 온 그대'같은 TV 드라마가 같은 소재를 8개 이상 사용했다는 문제가 강경옥 작가에겐 더욱 불편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아류작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현대사회는 여기저기 짜깁기한 느낌의 컨텐츠가 많다 보니 강경옥 작가처럼 독자적인 색깔을 가진 컨텐츠 생산자가 드문 시대입니다. 많은 만화가들이 드라마 작가 못지 않은 창작에도 불구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작품 활동을 마감해야했죠. 결국 이 논란은 어떻게 해결나든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누구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건 박지은 작가와 드라마 제작사라는 것 우리 모두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컨텐츠 생산자 보다는 자본 논리가 훨씬 더 개입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여길 방문하시는 분들이 강경옥 작가의 팬이냐 박지은 작가나 배우의 팬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관심없습니다. 저는 강작가님과 달라서 원칙에 어긋난 글은 무조건 삭제하는 플러그인도 이용중입니다. 제가 강경옥 작가 쪽을 좀더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컨텐츠 산업이 자본없는 약자에게 불리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보아왔기 때문일 뿐이고 최소한 양쪽 모두 작가로서 존중받을 입장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방송사나 제작자, 그리고 양쪽의 팬들 모두 양쪽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그 자세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법은 없어도 존중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블로거는 대부분 베꼈다는 주장을 하기 힘듭니다. 문장을 그대로 카피했으면 그나마 증거가 있지만, 사람 생각이 거기서 거기라는 이유로 기승전결까지 똑같은 주장을 베꼈다는 걸 증명할 수 없거니와 아이디어의 참신함은 인정받아도 그 생각에 동의하는 사람이 다른 맥락으로 글을 쓰는 걸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블로그' 자체가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는 매체다 보니 마구 퍼져나가 건 막을 수 없는 셈입니다. 인터넷 유머가 출처도 없이 퍼져나가는 과정도 비슷할 것입니다.
표절 논란에 대한 박지은 작가의 입장 표명과 강경옥 작가의 재반박. 두 사람의 입장차이는 왜?
그 때문에 박지은 작가의 '넝쿨째 굴러온 당신' 리뷰가 거의 똑같은 구조로 기사화된 것을 보면서며 그냥 어이없다는 생각만 했던 기억이 납니다(지금은 지워진 것 같군요). 포털에 글을 올리다보면 부분 부분 카피 당하는건 여러번 겪는 일입니다. 특히 정보를 정리한 내용은 복사본이 여기저기 굴러다닙니다. 당시 '넝쿨째 굴러온 당신' 포스팅 조회수가 상당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화제성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인터넷 뉴스와 공감을 중요시하는 블로그 포스팅은 소설이나 음악처럼 저작권을 주장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처음 강경옥 작가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표절 의혹을 제기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소송으로 강경옥 작가가 불리하다고 했습니다. 표절 영역에는 한 컨텐츠의 일부를 그대로 카피하는 부분 표절이 있는가 하면 전체적으로 알아볼 수 없도록 인용, 도용된 경우도 있습니다. 아이디어 도용이나 원작 변형도 크게는 표절에 해당합니다. 분명한 건 이런 표절의 최종 판단은 대부분 법원에서 결정난다는 것이며 어제 입장 표명을 한 박지은 작가의 경우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계산이 끝난 것으로 보입니다.
12. 22에 올라온 강경옥 작가의 '입장 정리' 8개의 클리셰가 우연히 반복되었다?
강경옥 작가는 '별빛속에(1987)' 등으로 유명한 SF 순정만화의 일인자이고 박지은 작가는 그동안 '내조의 여왕(2009)'이나 '넝쿨째 굴러온 당신(2012)'로 잘 알려진 통속극 작가입니다. 두 사람의 첨예한 대립은 법적 판단 외에도 드라마 작가과 만화작가의 대립이란 면에서 주목받고 있습니다. 특히 강경옥 작가가 처음 표절 의혹을 제기한 블로그와 관련 기사에 심한 욕설을 퍼부은 사람들과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는 방송사의 입장표명 때문에 강경옥 작가가 만화작가라서 무시한다는 말도 많았습니다.
두 작가를 옹호하는 입장 차이는 크게 보면 드라마 작가와 SF 작가의 차이가 보입니다. 특히 통속극 작가들의 표절 소송을 보면 한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는 부분 표절은 문제시하는 반면 전체적인 스토리의 구조가 유사하다는 점은 완전히 같지 않은 이상 개의치 않는 분위기가 있습니다(신데렐라나 가족 판타지가 재생산되는 걸 별로 큰 문제로 생각하지 않죠). 반면 SF 장르는 소재의 독창성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영화 '에일리언(1979)'이 '진홍색의 불협화음(Discord in Scarlet, 1939)'와 한두가지 설정이 유사하단 이유로 판권을 샀던 것처럼 말입니다.
드라마 작가 - 소재와 아이디어는 표절 대상이 아니다
예전에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 가든(2010)'이 표절 논란에 휩싸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황미나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황미나 작가 주장은 '전체 표절'이냐 '부분 표절'이냐가 아니라 '아이디어 도용'이었습니다. 황미나 작가 역시 데뷔 연차가 오래된 만화작가로 굵직한 히트작이 많은 작가였죠. 김은숙 작가의 '시크릿가든'이 정말 표절을 했느냐 안 했느냐 보다 핵심적인 주장은 만화가가 아이디어 제공자 노릇을 하고 있지만 그 대접을 못 받는다는 것이었죠.
드라마 작가들에겐 어떤 경우가 표절일까. 많은 사람들이 '설희' 논란이 불거지자 '설희'는 그럼 '진용(1988)'의 표절이 아니냔 말까지 꺼냈는데 드라마판에선 가족 드라마, 신데렐라, 복수극이 히트치면 그 소재와 포맷이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드라마는 TV 컨텐츠의 특징상 소재의 소재가 같냐 아니냐 보다 중요한게 같은 스토리와 주제를 다양하게 변형하는 것입니다. 한 장면을 그대로 카피하지 않은 이상 표절 소송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거의 없죠.
드라마 표절 소송의 대표 사례 '여우와 솜사탕(2001)'과 '사랑이 뭐길래(1992)' - 장면 카피를 중요시한다.
김수현 작가의 표절 소송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김수현 작가는 '사랑이 뭐길래(1992)'는 가풍이 전혀 다른 두 가족 즉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가족과 여성 중심의 가족이 결혼으로 맺어져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런 포맷은 MBC '장미와 콩나물(1999)'에서도 유사하게 반영되었지만 김수현 작가는 그 드라마를 표절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여우와 솜사탕(2001)'이란 드라마에는 '사랑이 뭐길래'와 내용만 비슷한게 아니라 대사가 같은 장면이 세 차례 이상 반복된다며 표절 소송을 벌였습니다.
위 소송에서도 알 수 있듯 드라마 작가들의 표절 기준은 '소재'나 '아이디어'가 아닌 같은 텍스트, 같은 장면의 연출입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구미호: 여우누이뎐(2010)'이 표절 소송에서 진 것도 도입 부분에 임충 작가의 '전설의 고향'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입니다. 홍자매 작가들은 워낙 유명한 이야기라 '오마쥬'였다고 해명했지만 임충 작가에게 허락받지 않아 소송 대상이 되었고 그로 인해 자격정지 1년이란 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여우와 솜사탕' 작가는 아예 제명되었죠).
'구미호:여우누이뎐(2010)'은 전혀 다른 내용이지만 앞부분 때문에 표절 판정을 받았다.
사실 문화관광부에서 밝힌 드라마, 영화의 표절 기준도 작가들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강경옥 작가도 아이디어 도용과 소재 차용이라는 자신의 입장이 불리하다는 걸 알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아이디어 도용'을 표절 대상으로 삼지 않는 분위기는 만화가들의 처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소위 같은 소재(강작가의 표현을 빌자면 '클리셰')를 동시에 여덟가지나 같이 쓰고 있어도 아이디어 도용 문제로 표절 소송에서 이기기는 꽤 힘들다는 것입니다.
SF 만화 - 참신하고 독특한 설정이 중요하다
그러나 '매트릭스(1999)'의 흥행으로 '이퀄리브리엄(2002)'이 많이 다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액션이나 빅브라더 월드라는 설정으로 아류작이란 평까지 들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SF 계열에선 예전에 썼던 소재를 썼든 새로운 설정을 창작해 내든 독창성이 중요합니다. 강경옥 작가는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일기를 토대로 400년간 세상을 살아온 이야기를 최초로 창조해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광해군 때 나타난 UFO를 토대로 만든 '기찰비록(2010)'이 있지만 그 드라마에 400년 간 살아온 외계인 혹은 인간이 등장하진 않습니다.
강경옥 작가는 예전부터 SF 만화를 그렸습니다. '별빛속에'가 지구에서 살아가던 한 소녀가 외계 행성의 공주였음이 밝혀지면서 슬픈 사랑의 여주인공이 되었다는 내용. 외계에서 지구로 버려졌기 때문에 입양 후 한참이 지날 때까지 중력 차이를 적응하지 못해 연습했다는 설정이나 지구에서 초능력, 고향별까지의 거리 때문에 자주 올 수 없다는 내용 등 SF 상식으로는 뻔한지 몰라도 상상력과 감성을 동시에 자극하는 독특한 이야기는 강경옥 작품의 핵심이었습니다.
강경옥의 만화는 SF 순정판타지라는 특징이 있다 - 참신한 설정이 그만큼 중요한 문제.
어렵고 복잡하지 않고, 누구나 쉽게 이해하기 쉬운 SF 설정을 배경으로 독자를 울리고야 마는 인간에 대한 시선은 강경옥 작가 특유의 매력이죠. 그래서 '설희'에서 배경으로 선택한 광해군 일기와 400여년이 걸린 환생과 타인과 공유할 수 없는 혈액, 주인공 설희가 인간에 대해 가진 따뜻하면서도 동시에 시니컬한 태도는 이 만화의 특징이고 독창성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소재 하나하나가 묶여서 이 만화의 SF적인 색깔을 결정하기 때문이죠.
위에서 언급한 영화 '에일리언'은 소설 '진홍빛의 불협화음'은 우주선 안에서 인간을 공격하는 괴생명체와 인간의 몸에 알을 낳는 설정이 비슷합니다. 영화, 소설을 모두 접해본 사람들은 두가지 설정만 빼면 두 이야기는 굉장히 다르다고 평가합니다만 어쨌든 영화사 쪽에서 판권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독특한 공포영화인 '에일리언' 자체가 여러 작품의 표절 논란이 있었기 때문에 작품을 위해서 어쩔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덕분에 '진홍빛의 불협화음'이 '에일리언'의 원작인줄 아는 분도 많더군요.
그동안 아이디어와 소재가 혹은 장면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찜찜한 드라마들이 많았습니다. 법적으로는 표절에서 안전하고 또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그들의 변명이 되겠지만 SF 장르와 소재가 8가지(강경옥 작가가 짚어낸 것만 8가지) 겹친다는 것은 다른 작품의 생명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강경옥 작가의 팬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도 그 부분이구요. 이 상황에선 2차 저작물 제작은 물건너 가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고의성이 없다고 쳐도 그 부분은 분명히 해야하지 않을까요.
표절 문제보다 더 중요한 건 만화작가를 향한 무례
박지은 작가는 사회 풍자에 능숙한 작가입니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이 인기를 끌었던 것도 시집살이란 진부한 주제를 유쾌하게 소화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통속극을 이렇게 재미있고 신선하게 쓰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합니다. 반면 강경옥 작가는 SF 속성을 인간의 사랑과 감성을 자극하는 도구로 이용했고, 그 쪽 분야에서 한획을 그은 만화가입니다. 법적으로 문제없다, 아이디어를 도용당했다는 양쪽의 입장차이는 충분히 이해하나 드라마 제작사가 만화작가의 입장을 존중한다는 느낌은 전혀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논란 초반부터 제가 분노했던 점은 강경옥 작가의 블로그에 감행되고 있는 각종 테러입니다. 작가에게 '오징어', '관종', '설친다' 같은 표현을 쓰며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이 논란에 더욱 불을 붙이고 있죠. 방송사와 드라마 제작자 만화작가의 관계에서 또 아이디어 차용을 인정하지 않는 관련법 앞에서 만화가는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만화작가들이 표절의혹을 제기할 때 마다 '말도 안된다'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방송사, 기업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 같네요.
장르 차이로 인한 입장차이는 이해한다 쳐도 무례함은 전혀 용납할 수 없다.
저같은 일개 블로거도 카피에 화가 나고 가끔씩 짜증이 납니다. 작은 부분이든 아이디어든 가끔은 우연히 겹쳤을 뿐인데도(시간 상으로 거의 동시에 글을 발표했더군요) 아쉬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모로 방송사나 팬들이 만화작가를 대등한 의혹 제기 대상으로 존중하기는 커녕 무시하고 무례하게 행동한다는데 큰 분노를 느낍니다. 따지고 보면 이 논란의 핵심은 표절 판정 보다 존중이죠. 강경옥 작가와 상관없는 제 블로그에 욕설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작가에게 어떤 말을 하고 다닐지 뻔한 일입니다.
소설에 외계인을 등장시키는 건 한때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큼 참신한 소재였습니다. 요즘은 어떤 소재를 써도 '어디서 본듯한 것들'이 더 많습니다. 외계인은 흔한 클리셰가 되버렸죠. 그렇다고 너무 익숙하지 않은 소재를 쓰면 대중성이 떨어져 독창성을 확보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더욱 '별에서 온 그대'같은 TV 드라마가 같은 소재를 8개 이상 사용했다는 문제가 강경옥 작가에겐 더욱 불편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습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아류작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죠.
만화작가는 자본 앞에서 약자다 - 이 표절 논란에서 중요한 건 존중(이미지 출처: 강경옥 작가 블로그)
현대사회는 여기저기 짜깁기한 느낌의 컨텐츠가 많다 보니 강경옥 작가처럼 독자적인 색깔을 가진 컨텐츠 생산자가 드문 시대입니다. 많은 만화가들이 드라마 작가 못지 않은 창작에도 불구하고 존중받지 못하고 작품 활동을 마감해야했죠. 결국 이 논란은 어떻게 해결나든 양쪽 모두에게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누구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는 건 박지은 작가와 드라마 제작사라는 것 우리 모두 불을 보듯 뻔히 알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컨텐츠 생산자 보다는 자본 논리가 훨씬 더 개입될 것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여길 방문하시는 분들이 강경옥 작가의 팬이냐 박지은 작가나 배우의 팬이냐 하는 문제는 전혀 관심없습니다. 저는 강작가님과 달라서 원칙에 어긋난 글은 무조건 삭제하는 플러그인도 이용중입니다. 제가 강경옥 작가 쪽을 좀더 지지하는 것은 그동안 컨텐츠 산업이 자본없는 약자에게 불리했다는 걸 알기 때문이고 보아왔기 때문일 뿐이고 최소한 양쪽 모두 작가로서 존중받을 입장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방송사나 제작자, 그리고 양쪽의 팬들 모두 양쪽을 존중하는 입장에서, 그 자세를 지켜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해법은 없어도 존중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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