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드라마 이야기/직장의 신

직장의 신, 미스김이 두려워하는 것은 '밥정'을 쌓는 일

Shain 2013. 5. 8.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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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해운대 화재사건에서 무엇 보다 논란이 되었던 것은 그 건물에서 일하던 환경미화원들의 입건 뉴스였습니다. 그 화려한 고층빌딩에서 일하던 환경미화원들은 옷갈아입을 탈의실 하나 없어 배관실을 정리해 탈의실 겸 휴게실로 썼습니다. 애초에 그 건물의 외벽마감재는 불연성이 아니었음에도 불법휴게실에서서 불이 났다는 이유로 미화원들이 입건되었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른 미화원 휴게실도 없고 불연성 소재로 건물을 마감하지도 않은 그 업체는 화재에 대한 책임을 질 생각도 환경미화원들이 어디에서 밥을 먹는지도 전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직장의 신' 신입사원 정주리(정유미)의 말대로 빛나는 전구에도 급이 있다고 하던가요. 계약직들은 도시락을 먹다가 냄새난다는 황갑득(김응수)의 말에 도시락 싸오기를 포기합니다. 도시락 조차 눈치보는 그들의 처지가 건물 미화원들을 떠오르게 하더군요. 한 건물에서 같은 회사를 위해 일하지만 사무계약직 보다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계약직 미화원들은 도시락 먹을 공간이 없어 비트실이나 화장실 옆 물품 보관소에서 식사를 합니다. 어떤 회사는 계약직에게 구내 식당을 이용할 권리 조차 주자 않습니다.

미스김이 굳이 점심을 혼자 먹겠다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주리엄마가 무정한(이희준)에게 보낸 편지 내용대로 '꼭 피를 나눈 식구 아니라도 한솥밥 먹음 다 한식구'라고들 합니다. '한솥밥 먹는다'는 관용적인 표현은 같은 솥에서 푼 밥을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 주로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을 그렇게 표현합니다. 함께 밥을 먹고 친밀해진 사이를 또다른 말로 '밥정'을 쌓은 사이라고 하지요. 극중 구세대의 모델인 고정도(김기천) 과장이 밥먹고 가라며 미스김(김혜수)을 잡는 것도 인간적으로 친해지자는 뜻입니다.

직장생활을 하자면 함께 술마시는 것 보다 밥정을 쌓는 일이 중요합니다. 함께 고생한 동료들과 같이 밥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면 인간관계가 돈독해진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 혼자서 밥먹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요. 함께 '식구'로 살아온 세월이 길면 길수록 상대방을 모질게 대할 수가 없습니다. 황갑득이 30년지기 친구인 고정도를 단칼에 내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이걸 역으로 말하면 금방 헤어질 사람과는 식사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겠죠.

도시락을 함께 나눠먹는 계약직 여직원들. 식당 이용 조차 차별하는 회사도 많다.

극중 장규직(오지호)을 비롯한 정규직들은 점심도 업무의 연장이란 이유로 계약직들과 밥정쌓는 일을 거부합니다. 미스김 역시 밥은 절대로 혼자서 먹는다며 동료들과 식사하기를 거절합니다. 미스김이 그들과 밥을 함께 먹지 않는 것은 회사는 정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는 자신의 가치관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도 미스터리한 미스김의 과거를 살펴볼 때 한솥밥먹는 사람들과 밥정 쌓기가 무서워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3개월의 근무기간이 끝나면 출국해버리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대한은행 화재사건으로 사망한 미스김의 은행선배 전미자(이덕희)는 미스김이 실수할 때 마다 뒷처리를 해주었고 직접 싸온 도시락을 먹이며 달래주었습니다. 미스김을 '붕어똥'이라며 진짜 붕어될 때까지 내 뒤에 딱 붙어 있으라며 격려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붕어들은 길다란 붕어똥을 몸에 달고 헤엄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웃기기도 하지만 새내기 직장인 미스김에게는 그 무엇 보다 든든하고 따뜻한 위로였을 것입니다. 미스김은 밥을 나눠먹는 직장선배와 그런 인간적인 정을 쌓았던 것입니다.

미스김을 붕어똥이라 부르며 도시락을 나눠먹던 전계장. 미스김이 그리워하던 직장은 이런 모습이었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 그런가 주리엄마가 도시락을 싸들고와 직장동료들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한때는 미스김처럼 직장동료들과 필요 이상의 정을 나누지 않겠다고 마음먹다가도 직장동료들에게 뭐라도 하나 가져다 주라며 챙겨주던 어머니 생각 났습니다. 계약직과 정규직의 차별이 심해지고 이제는 계약직과 정규직이 갈등하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에 있어도 어머니 말처럼 어차피 직장도 사람사는 곳입니다. 비현실적인 무정한의 이상이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구요.

미스김은 이익에 따라 직원들을 정리해고하고 필요한 만큼 계약직을 쓰다 버리고 계약직들의 식사공간 조차 마련해주지 않는 기업문화가 거세질수록 정말 한솥밥먹는 식구처럼 지낼 수 있던 시절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미스김은 자신을 '붕어똥'이라 부르던 전계장이야말로 진짜 이상적인 직장의 모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실이 그럴 수 없기에 같이 밥먹기를 거부했고 같이 도시락먹자는 주리엄마에게 어쩔 수없이 끌려가는듯했지만 미스김 자신이 누구 보다 밥정이 고팠던 것입니다.

주리 엄마의 도시락 덕분에 처음으로 한솥밥을 먹게 된 영업부 직원들. '한솥밥먹는 사이'란 뭘까.

무정한이 정주리가 만든 기획안을 자신의 소신대로 제출하자 황갑득이 정주리를 계약해지하려는 부분은 얼핏 잘 이해가가지 않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전통적인 정직원의 자존심을 강조하는 일본의 기업문화가 드러난 부분이자 원작에서는 '파견'이던 정주리를 한국의 일반 계약직으로 묘사하다 생긴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우리 나라 경우 명색이 '공모전'이면 결과를 두고 계약직을 해고할 정도로 반발하기 보다 그 계약직을 정직원으로 고용하는게 광고 효과에도 낫겠죠.

다음주에는 겉으로는 쎈 척 정떼는 척하면서도 밥정을 그리워하고 집밥을 좋아하는 장규직이나 미스김이 주리엄마를 봐서라도 남몰래 정주리를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말로는 계약직, 정규직은 다르다고 하고 칼퇴근에 칼수당을 좋아한다고 하지만 미스김이 바라는 직장은 평생을 함께 할 수 있고 한솥밥 먹으며 밥정을 나누는 그런 직장이었을 것입니다. 무정한의 신념처럼 원래 사람사는 곳은 그래야하는게 맞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미스김은 오늘도 혼자 밥을 먹는게 아닐까요.

* 붕어똥이란 표현도 그렇지만 부하직원의 잘못을 사과할 때 무릎을 꿇거나 윗사람 아랫사람 가리지 않고 90도로 허리굽혀 인사하는 건 우리 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문화같습니다. 극한 사과의 상황에서도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드물고 차라리 절절 매거나 붙잡고 매달리는 쪽이 더 많은 듯합니다. 혹시 일드 장면을 그대로 옮긴 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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